천상으로 향하는 가든, 그들만의 비옥한 파티
이웃을 갈라치는 선긋기에서 서로를 이어주는 선긋기로

▲ 가든 파티.
 “어떻게 하면 그만둘 수 있을까”
 “그만둔다고, 로라? 무슨 뜻이지”
 “물론 가든파티를 그만두는 거야. 왜 모르는 척해?”
 “가든파티를 그만둔다고? 이봐 로라, 그런 바보같은 소리는 하는 게 아니야. 엉뚱한 소리를 하면 못써.”
 “그렇지만 바로 대문 앞에 사는 사람이 죽었다는데, 가든파티 따위를 할 수는 없지 않아? 게다가 악대 소리가 들린다면, 그 가엾은 여자가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생각해 봐.”
 “오, 로라! 누구든 사고를 일으킬 때마다 악대 연주를 그만둔다면 정말 견디지 못할 평생을 보내게 돼. 나도 역시 너처럼 가엾은 일이라고 생각해. 마찬가지로 동정하고 있어. 감상적이 된다고 해서 주정뱅이 일꾼은 되살아나지 않아.”
 “주정뱅이라고? 누가 주정뱅이라고 했어?”
- ‘가든파티’, 캐서린 맨스필드
 
 열두어 살 소녀 로라가 언니와 논쟁 중이다. ‘코끼리 아저씨가 가랑잎 타고서 태평양 건너갈’ 정도로 화창한 날에 가든파티를 여는데, 가난한 이웃의 가장이 뜻밖의 사고로 목숨을 잃어 파티를 취소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언쟁이 오가는 것이다. 윤리와 현실을 놓고 두 어린 소녀가 서로 자기 생각이 지극히 상식임을 강조하고 있다. 대저택의 정원에는 이미 가든파티를 위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고 분위기를 위한 악단도 곧 도착할 예정이다. 가든파티는 예정대로 열려야 하는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중지해야 하는가?

 서로 다른 가치관이 충돌할 때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까? 로라는 정서적 공감능력이 뛰어나다. 이웃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 슬픔에 동참하려 한다. 로라는 자기가 사는 집을 기준으로 이웃을 정하고 있다. 언니 조우즈는 현실적이며 합리적이다. 오늘 열리는 파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을 최대한 즐기려고 한다. 조우즈는 자기가 관계를 맺고 있는 커뮤니티를 가장 중요한 이웃으로 여기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이웃에 대한 배려와 커뮤니티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상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쉽지 않은 문제다.
 
▲딜레마 존, 정서적 공감과 사회적 책임 사이
 
 “아니, 그런 사람이 폐품 말고 또 뭘 훔쳐갈지 어떻게 알아요”
 “지난번에 그 할머니가 구루마로 우리 차 긁고 갔어요. 다음에 그 할머니 눈에 띄기만 해봐요, 나 가만 안 있을 거예요. 그 할머니도 당해봐야 알지.”
 “내가 사실은, 그 할머니를 내내 챙겨주고 있었어. 우리 집에서 뭐 생기면 나는 모아다가 그 할머니 갖다 줬다고. 아파트 안에 들어오지 말라고 내가 미리 그렇게 생각해주고 있었는데 기어코….”
 “그 할머니가 부동산 몇 채를 가진 노인네라는 얘기가 있어. 그런데도 악착같이 폐지 줍고 구청에서 복지비 다 타먹고 아주 지독한 노인네라고.”
 어느 날 새벽, 아파트에 경찰이 왔다. 재활용품을 훔치는 중이던 할머니를 잡아갔다고 한다. 이상한 사람이 단지 내에 침입해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 같다고 누가 신고했다는 말을 들었다. 캔이 딸그랑거리는 소리 때문에 신고가 들어왔다고 하는데, 할머니가 경찰을 따라가지 않으려고 해서 소란이 커졌다고 했다. 그날 아침 학교에 가다가 할머니의 리어카를 보았다. 재활용품 수거함 근처에 세워진 리어카 안에는 원래 뭐였는지 알 수 없는 긴 봉, 캔이 든 비닐봉지와 신문지가 담겨 있었다. 경비 아저씨가 그걸 끌고 가서 관리실 뒤쪽에 세워두는 것을 눈여겨봐 두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리어카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할머니도 보지 못했다.
- ‘선긋기’, 이은희
 
 누구나 자기가 사는, 또는 자기가 관계하고 있는 공동체와 커뮤니티가 안전하기를 바라고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 부유함과 빈곤함으로 삶의 터전이 나뉘고 그 거리감을 유지하려는 태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없던 일은 아니었다. 빈부의 차이를 떠나 지리적으로도 공연히 ‘물아랫것들’, ‘섬것들’, ‘뭍놈들’ 하며 서로를 배척해왔다. 한때 이러한 배척과 텃세는 자기 공동체의 단합을 도모하여 스스로를 보호하는 효과도 있었으나,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그 규모에 걸맞는 체계화된 치안 시스템이 확보되면서 과거의 원시적 배격행위는 사라진지 오래다. 하지만 빈부의 차이에 따른 ‘갈라치기’는 새로운 형태로 변화된 모습을 보이며 되살아나고 있다.

누구나 자기가 사는, 또는 자기가 관계하고 있는 공동체와 커뮤니티가 안전하기를 바라고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

 산업화 이후 한국에는 괴상한 ‘아파트 문화’가 생겨났다. 비싼 아파트와 값싼 아파트 사이의 통로를 억지로 막고 왕래를 끊으려는 행위가 그것이다. 거의 전부가 ‘비싼 것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천박함은 이제 한국사회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 돼버렸다. 이런 일들은 이제 담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일을 넘어 담 안의 약자들에게까지 가해지고 있다. 흔히 갑질이라 불리는 추악함은 경비원이며 청소원을 넘어 박스를 줍는 노인들에게까지 아무 거리낌없이, 그리고 부끄럼없이 행사되고 있다. 하늘에 조각구름이 떠 있고 강물에 유람선이 떠 있어도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은 언제나 자유롭지 않은 사회가 우리가 사는 한국이다.
 
▲물리적 빈곤보다 정서적 단절이 더 슬프다
 
 색은 총 다섯 가지를 표현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흰색과 검은색, 흰색의 검은 부분과 검은색의 흰 부분, 그리고 그림자의 색. 귀퉁이에서부터 그을 것인지 한가운데에서부터 그을 것인지 마음속으로 시작해보았다가 매번 지웠다. 거친 선으로 그릴지 날카로운 선으로 그릴지부터 결정해야 했다.
 촉이 가느다란 검정 펜을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시작을 못하던 어느 아침에 첫눈이 내렸다. 나는 할머니의 리어카를 오랜만에 보았다. 리어카 안의 박스 몇 장이 눈에 젖어 있었다.
 그날 나는 아주 천천히 선을 그어 그림을 그렸다. 여러 번 덧대어 긋자 눈을 맞은 듯 음영이 지고 한숨이 나오는 선들이 생겨났다.
 나는 그림의 바닥부터 맨 위까지 선이 쌓이게 놓아두었다. 결이 되고 면이 되도록 빈 종이에 선을 모으는 기분이었다. 신기하게도 어떤 선은 포동하고 뽀얀 빛을 지녔다. 손끝부터 어깨를 지나 반대편 손끝까지인 것처럼 어떤 것은 벌린 팔을 닮아 보였다.
 우리 반 아이들은 그림을 보고 의아해했다. 너 왜 선긋기 해? 미술 처음하는 사람이나 하는 거잖아? 나는 이렇게 가득 모아서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대답했다. 누군가 알아들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 ‘선긋기’, 이은희

누구나 자기가 사는, 또는 자기가 관계하고 있는 공동체와 커뮤니티가 안전하기를 바라고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
 
 로라처럼 따뜻한 감성을 지닌 열여섯 살의 소녀가 가난한 할머니와 배고픈 고양이를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 고양이에게 참치 캔 하나 따 주는 일이, 할머니와 토스트 하나 나눠먹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 하겠지만 그건 작은 일이 아니다. 사람이란 물리적 빈곤으로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정서적 단절로도 큰 아픔을 겪는다. 이 어여쁜 소녀는 ‘갑’과 ‘을’ 사이를 가로막는 흉한 ‘선긋기’를 하는 것보다는 할머니의 구루마에 납작한 박스를 하나하나 쌓아주려는 따뜻한 마음으로 도화지에 ‘선긋기’를 하는 모양이다.

 로라의 파티는 어찌 되었을까? 황당하다는 눈길로 쳐다보는 온 가족의 시선을 이겨낼 장도로 로라는 크지 않으며 강하지도 않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가든파티는 호화롭게 시작해서 성대하게 끝났다. 그리고 달콤한 피로와 함께 찾아온 이 부유한 저택의 저녁 티타임. 그들의 안락한 식탁 위로 찾아오는 어둠처럼 무겁고도 불길한 죄책감. 이웃의 슬픔에 아랑곳하지 않고 파티를 열고야 만 이 가족들은 죄책감을 떼 내지 않고서는 잠들지 못한다.

갑과 을 사이를 가로막는 흉한 ‘선긋기’보다는 할머니의 구루마에 납작한 박스를 하나하나 쌓아주려는 따뜻한 마음의 ‘선긋기’여야 하지 않을까. 그림 박종성 화가
 
▲선긋기, 이웃을 갈라치거나 이어주거나
 
 로라는 가까이 다가갔다. 젊은 남자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너무도 평화롭게 잠들고 있어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같았다.
 ‘아아, 이렇게 멀리 떨어져 평화롭게 잠들고 있다. 꿈을 꾸고 있음에 틀림없다. 두번 다시 그를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좋아.’
 그의 머리는 베개에 파묻혀 있고 눈은 감겨져 있다. 눈은 감겨 있으므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꿈의 세계를 거닐고 있다. 가든파티나 바구니나 레이스 달린 옷들이 지금의 그에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런 것들로부터 아주 먼 세계에 가 있는 것이다. 아주 멋있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들이 껄껄대며 웃고 있는 동안에, 악대가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동안에, 이런 놀라운 일이 골목에서 일어난 것이다.
 할 말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울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무슨 말을 걸지 않고는 방을 나올 수 없었다. 로라는 어린애처럼 흐느끼기 시작했다.
- ‘가든파티’, 캐서린 맨스필드
 
 기어코 가족들은 어린 로라에게 가든파티의 남은 음식들을 바구니에 싸서 로라의 손에 들려줌으로써 도덕적 책무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로라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기꺼이 고인의 집을 문상한다. 고인의 유족들은 로라의 걱정과는 달리 차분하고 정중했다. 평화롭게 잠든 고인의 모습을 보며 로라는 무례하게 파티를 열어버린 가족을 대신하여, 그리고 철없는 제 모습을 부끄러워 하며 말한다.

 “이런 모자를 쓰고 와서 정말 미안해요.”
김시인 <인문학공간 소피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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