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차는 풍차가 아니고 마녀는 마녀가 아니다
순리와 질서의 파괴자들, 맥베스와 돈키호테의 시간

▲ 신이 인간을 시험할 때는 본연의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더구나 시험에 들게 할 욕망이 더러운 것이라면 필연코 추한 존재여야 한다. 그래서 마녀다.
 마녀 1 : 맥베스 만세, 코더 영주 만세!
 맥베스 : 코더 영주 만세? 코더 영주라고?
 마녀 2 : 맥베스 만세. 장차 왕이 되실 분 만세!
 맥베스 : 뭐라고? 나 맥베스가 왕이 된다고?
 마녀 3 : 맥베스 만세. 장차 왕이 되실 분 만세!
 맥베스 : 내가 왕이 된다니, 참으로 터무니없는 말이로다.
 뱅쿠오 : 하하하! 장군께서 왕이 된다는 건 기쁜 일이나, 축하를 드리자니 반역이 될 테고, 이거 참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맥베스 : 듣기 싫소. 당치 않은 말이오.
 뱅쿠오 : 허허! 맥베스 장군, 뭘 그리 펄쩍 뛰시오? 너무 듣기 좋은 말이라 겁이 나십니까? 아니면, 속마음을 들킨 것같아 그러십니까?
 맥베스 : 어허, 놀리지 마시오. 반역자가 되느니, 차라리 내 목숨을 내놓겠소이다.
 뱅쿠오 : 과연 스코틀랜드 장군다운 말씀이십니다. 이렇게 강직하시니 나도 맥베스 장군을 믿고 따를 수밖에요. (마녀들을 향해) 자, 그럼 나는 어떠냐? 나한테도 무슨 말을 해줘야지. 너희들에게 미래라는 씨앗을 꿰뚫어보는 힘이 있어서 어떤 씨앗이 싹트고 어떤 씨앗이 썩어버릴지 예언할 수 있다면 말해보아라.
 마녀들 : 만세! 맥베스보다는 못해도 훨씬 위대하신 분. 만세! 맥베스만은 못해도 훨씬 운이 좋은 분. 밴쿠오 만세! 맥베스에는 뒤지지만 자손대대로 왕을 낳으실 분.
- 셰익스피어의 ‘먁베스’
 
▲르네상스를 꽃피운 도시에 만발한 음모와 살육

 바야흐로 장군들의 위기다. 승전(勝戰)의 기쁨을 안고 귀향하는 두 장군에게 누구는 왕이 되고 누구는 왕의 조상이 된다는 모호하고 모순된 예언을 들었다는 사실이 위기인가? 둘이 모두 역신이거나 충신이면 위기는 아니다. 스코틀랜드 최고의 장수 두 사람이 역심과 충심을 나누어 가지게 되는 것이 위기요 비극이다.

 르네상스는 쇠퇴한 헬레니즘이 다시 복권된 시대를 대표하는 언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회화와 조각, 건축과 학문이 화려하게 부활한 문예사조로서의 르네상스는 과잉된 헤브라이즘을 밀어내고 서양 사상에 조화와 균형을 선물했다. 이렇게만 보면 르네상스 시대를 유럽의 요순시대라고 착각할 수 있는데,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그리 간단치가 않다.

 중세 전체를 긴장시켰던 황제권과 교황권의 대립, 중세 후반을 휩쓸었던 바이킹의 난동, 죽음의 원정 십자군 전쟁, 1억 명을 전멸시킨 흑사병은 1차대전이 있기 전까지 유럽의 난세를 대표하는 대란이라고 부를 만했다. 그런 점에서 헬레니즘과 르네상스는 문예, 학문, 사상, 종교적으로는 해방의 시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세상은 위에 열거한 범주로만 묶이지 않는다. 먹고사는 문제의 기본인 경제와 먹고사는 일을 어떻게 조절하느냐 하는 정치로 묶이면 사람은 쉽게 해방되지 않는다.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도시가 마냥 화려했던 것만은 아니다. 영국이 자랑하는 문호 셰익스피어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문학가다. 그는 희곡이라는 장르로 이름을 떨친 르네상스 시대의 통속 소설가다. 그의 희극은 당대 유럽의 웃음사요 그의 비극은 당대 눈물사라 할 만한데, 셰익스피어의 문학적 고현학(考現學)은 당시 유럽의 모든 통속적 삶과 문화를 대변해주는 고고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셰익스피어의 통속소설은 그 시대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유력한 두 가문이 도시 한복판에서 집단 난투극과 칼부림으로 사람을 죽이고 가문의 명성과 권력을 위해 자식들까지 살해하는 비극이 일어났던 곳이 ‘말괄량이 길들이던’ 베로나였다. 이방인과 토착민이 출세와 권력을 놓고 암투를 벌이다 섹스 스캔들로 제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 곳이 돈을 갚지 못한다며 채무자의 진짜 가슴살을 베어내겠다고 덤벼들던 베니스였다. 잉글랜드에서는 노망난 애비가 착한 딸년을 내쫓고 못된 딸년들에게 얹혀살다 자기도 쫓겨나 결국은 온가족이 몰살한다. 덴마크에서도 삼촌이 형을 죽이고 왕이 된 뒤 형의 아내마저 빼앗는 일이 벌어졌으니 변방의 스코틀랜드에서 장군 하나가 왕위를 넘본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는가?

 르네상스 도시들은 문화예술적으로 꽃피었지만 그 부흥의 목적은 돈과 경제였다.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장원경제는 새로운 생산관계에 걸맞는 생산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십자군 전쟁으로 눈부신 아랍 문명을 접한 시골 유럽의 출구는 도시, 그것도 동방과의 교역이 활발했던 항구도시의 재건이었다. 돈안되는 농촌을 버리고 돈되는 도시로 몰려나오는 귀족영주들은 너도나도 자신이 지배하는 도시로 돈을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상업적 시스템을 구축하였고 이 상업적 시스템 속에는 문화예술과 관련한 서비스업도 따라붙게 되었다. 르네상스 도시는 문예도시이며 상업도시였다.

 르네상스 도시들의 각축과 경쟁은 아주 치열해서 크고작은 전쟁이 아주 빈번하게 일어났다. 프랑스가 영국으로 쳐들어오고, 투르크가 베니스를 위협하고, 노르웨이가 스코틀랜드를 공격하는 일이 셰익스피어 문학의 허구로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르네상스의 꽃이라 불리던 피렌체의 권력쟁투와 전쟁은 허구가 아니라 그대로 실제의 역사였다.
 
▲짧은 미래를 얻고 긴 미래는 얻지 못하다

 스코틀랜드 왕 덩컨은 무능한 왕이었다. 전투에 직접 나서 승리를 거둘 능력도 없었고 성에 틀어박혀 벌벌 떨다가 반란이 진압되자 맥베스가 두려워 과도하게 은전을 베푸는 겁쟁이였다. 게다가 맥베스의 노고를 위로한답시고 그의 성으로 가서 파티를 연 것은 맥베스의 안전한 품에 깃들겠다는 무의식적 투항에 다름 아니었다.

 맥베스는 스코틀랜드의 미래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그는 짧은 미래를 얻고 긴 미래는 얻지 못했을까? 왕에 눈멀어 살인도 마다하지 않은 권력욕이 그의 미래를 망쳤을까? 아니면 맥베스보다도 더 큰 야망을 가진 레이디 맥베스 때문이었을까? 맥베스 혼자만의 욕망이든 부인과 공조한 욕망이든 비극적으로 마감한 장군의 일대기 행간에 흐르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산초야, 저것 좀 보아라. 괘씸한 거인들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느냐? 나는 저놈들을 몰살시킨 뒤 전리품으로 부자가 되어야겠다.”

 “거인이라뇨?”

 “바로 저기에 있는 게 그놈들이 아니고 뭐냐? 저놈들 말이다. 놈들 중에는 2레구아나 되는 긴 팔을 가진 놈도 있지 않느냐?”

 “나리. 저기 보이는 것은 거인이 아닙니다요. 풍차란 말입니다요. 팔이라고 하신 것은 날개인데 바람의 힘으로 돌아서 멧돌을 움직입죠.”

 “너는 이런 모험은 도통 모르는구나. 저것은 틀림없는 거인들이야. 겁나거든 내가 상대하는 치열하고 일찍이 보지 못한 싸움을 구경이나 하여라.”

 “나리, 저건 풍차라니까요.”

 “비겁하고 어리석은 거인들아. 너희들과 대적할 사람은 오로지 이 기사뿐이로다. 비록 네놈들이 저 거인 브리아레오보다 많은 팔을 움직인다 할지라도 나하고 한판 겨루지 않으면 안될 줄 알아라. 오, 사모하는 둘씨네아 공주님이시여! 부디 이 충직한 기사를 보호하소서.”
-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중세로 퇴각하는 갑주 속의 낭만기사

 바야흐로 기사들의 위기다. 명색이 기사라면 날랜 말을 타고 눈부신 갑주 속에 충심을 가득 담아 국왕을 따라 야만인과 이교도를 정벌하러 가야 기사된 맛이 난다. 아니면 검은 망토 속에 신심을 가득 담고 잃어버린 성궤를 찾아 떠나거나 수도원을 지켜야 기사의 멋이 난다. 그런데 이제 기사가 설 자리는 없다. 총포 한방이면 나가떨어지는 세상이니 기사의 위엄이 어디 있겠는가? 아서 왕이 이끌던 원탁의 기사들은 먼 옛날의 추억이 돼버렸고, 정신나간 기사들은 길손의 봇짐을 털거나 농부에게 삥을 뜯는 일로 소일하고 있다. 중세의 생산관계가 무력을 담당했던 기사 계급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중세의 가을’에 땅뙈기라도 마련해둔 기사들은 자작농으로서 입에 풀칠이나 겨우 할 수 있었다.

 머리가 돌아버린 우리의 낭만기사 키호테 선생은 병들고 말라빠진 말 한 필 끌고 게을러빠진 농노 하나 앞세워 둘씨네아 공주 구해 결혼도 하고 돈벌어 출세하는 꿈의 패키지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동굴 속에 꽁꽁 숨었을 줄 알았던 괴물이 떠억하니 언덕 위에 버티고 섰으니 용감한 키호테 선생이 어찌 그냥 내버려두겠는가? 로시난테에 박차를 가해 돌격! 하지만 돈키호테는 담배가게 아가씨를 구하려던 송창식이 돼버렸다.
 
 가장 격렬한 논쟁은 풍차에 관한 것이었다. 농장 축사에서 멀지않은 긴 방목장의 작은 언덕은 농장에서 가장 높은 지대였다. 스노볼은 그곳이 풍차를 세우기에 적당한 장소이며, 그 풍차로 발전기를 돌려 농장에 전기를 공급할 거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밤에도 축사를 환하게 밝힐 수 있고 겨울에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다고 했다. 풍차가 완성되면 노동력이 많이 절감되기 때문에 동물들은 일주일에 3일만 일하면 된다고 했다.
-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풍차는 중세를 탈출하는 바람이다. 날로 거대해지는 풍차는 근대로 가는 새로운 생산력이다. 탈중세 생산력이라는 괴물에게 먹히지 않을 낡은 생산관계는 없다.
 
 풍차는 중세를 탈출하는 바람이다. 날로 거대해지는 풍차는 근대로 가는 새로운 생산력이다. 중세의 생산관계와 중세의 관념 속에 머물고 있는 낡은 기사의 눈에 거대한 풍차는 제 목숨을 빼앗고 사랑하는 연인을 납치하는 괴물로 비쳤을 것이다. 탈중세 생산력이라는 괴물에게 먹히지 않을 낡은 생산관계는 없지만 미리 앞날을 내다보고 변신해버린 자들이 아닌 족속들은 이렇게 정신착란이라도 일으켜서 헛된 기사도의 무용담에 자신을 끼워넣을 수밖에.

 돈키호테의 비극과 맥베스의 비극은 본질적으로 동일하고 철학적으로 유사하다. 그들의 비극은 모두 시간을 망각하고 순리를 거스른 데서 출발한다. 출세와 로맨스라는 돈키호테의 어이없는 가출은 중세로 퇴각하는 갑주 속의 낭만기사일 뿐 중세를 호령하던 용맹한 기사가 아니다. 대륙 전체가 거대한 변화로 꿈틀대는데도 여전히 구시대적 사고와 망상에 사로잡히는 건 시간의 역행이고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행위에 불과하다.
 
▲아름다운 오월과 잔인한 오월, 순리와 질서의 파괴자들

 맥베스는 어떠한가? 돈키호테의 시간이 과거를 향해 달린다면 맥베스의 시간은 미래를 향해 날아간다. 미래로 향하는 시간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날아가는 시간은 문제가 된다. 낯선 예언을 듣자마자 흥분한 그는 욕망을 드러낸 편지를 아내에게 보내고 왕과 동행하는 기쁨과 영광을 버리고 미리 달려가 계략을 짜는 욕망의 속도는 폭풍처럼 빠르다. 맥베스가 스코틀랜드의 진정한 미래라면 무능한 덩컨은 도태될 수밖에 없고 준비된 맥베스는 순리를 받아들이면 된다.

 마녀는 누구인가? 선하고 충직한 맥베스를 꼬드겨 반역으로 이끌어 종래에는 파멸로 이끈 마귀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맥베스의 내면에 도사린 욕망의 외재화된 이미지인가? 마녀는 존재하지 않으니 마녀는 맥베스의 욕망이라고 보아야 하나?

 신이 인간을 시험할 때는 본연의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더구나 시험에 들게 할 욕망이 더러운 것이라면 필연코 추한 존재여야 한다. 그래서 마녀다. 그런데 마녀는 무슨 말을 하는가? 뛰어난 두 장군의 미래를 말하고 있다. 만약 순리가 그들 편이라면 그들은 순리에 따르면 된다. 밴쿠오는 순리를 따른다. 마녀의 예언을 과도하게 부정하지도 않으며 맥베스처럼 반역을 꾀하지도 않는다

 나란히 등장하는 세 명의 여신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의 삼신할미는 잉태와 출산의 여신들이다. 산모의 순산을 돕는 것은 만물의 생성을 관장하는 것과 같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탄생을 돕는 여신이 이치의 여신 테미스인 것은 잉태와 출산이 자연의 법칙이요 순리이기 때문이다. 자연과 순리를 거스르는 것만큼 큰 죄악도 없다. 출산을 막고 성장을 방해한 거신 우라노스와 크로노스가 제거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호라이 세 여신과 모이라이 세 여신은 각기 시간과 운명을 관장하고 있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시간의 흐름이라는 자연의 순리와 운명의 순응이라는 사회적 질서를 대변하고 있다. 우미의 세 여신 카리테스나 복수의 세 여신 푸리에스도 유사하다.

 테미스는 이치의 여신답게 시간의 여신들을 낳았다. 이들 세 명의 여신 호라이는 계절과 자연의 질서를 관장한다. 세 여신의 권능은 인간사회에까지 확장되어 질서(에우노미아)와 정의(디케)와 평화(에이레네)를 주관한다. 운명의 실을 잣고 감고 끊는 여신들도 있다. 클로토와 라케시스와 아트로포스는 운명의 여신들로서 필연적으로 다가올 인생을 보여준다. 호라이 여신들과 모이라이 여신들은 각기 시간과 운명을 관장하고 있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시간의 흐름이라는 자연의 순리와 운명의 순응이라는 사회적 질서를 대변하고 있다. 우미의 세 여신 카리테스나 복수의 세 여신 푸리에스도 자연의 순리 및 사회의 질서와 관계가 있다.

 승리의 흥분과 출세의 갈망에 골몰하는 맥베스 앞에 마녀라는 맥베스 내면 욕망의 이미지로 현신한 세 여신은 과업에 취해 순리와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음을 시험하고 또한 경고하였으나 이미 광기에 젖은 맥베스는 멈추지 않고 자신의 시간으로 내달리고 만다. 맥베스의 질주하는 욕망은 여신들의 2차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버넘의 숲이 움직이지 않는 한 맥베스는 패하지 않으며, 여자의 생식기로 태어난 자는 맥베스를 죽일 수 없다는 운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땅에 뿌리를 박은 나무는 움직이지 않으며 모든 인간은 여자의 생식기로 태어나는 것이 순리다. 맥베스는 이 순리를 거스를 수는 없다고 믿었기에 자신의 파멸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맥베스는 순리를 어긴 반역자다. 순리를 거역한 자가 순리를 믿는다? 이건 역설이다. 맥베스의 비극은 순리에 역행하고 질서를 파괴한 것에 있다.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다. 오월은 화초와 신록으로 강산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하지만 아름다운 사월과 오월에도 아픔과 슬픔은 있다. 헬레니즘이 만발한 르네상스의 도시에서도 잔인한 음모와 살육이 있었듯이 우리 강산에서도 비극은 있었다. 비극이란 가장 기쁘고 행복한 순간에도 찾아올 수 있다. 순리를 거스르고 반란의 칼을 들어 강산을 맥베스의 도시로 만든 반역자들은 파멸했는가? 자연의 순리는 살아있는 생명의 땅에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이승을 넘어 저승까지 이어지는 게 순리다. 그래야 진짜 순리다.
김시인 <인문학공간 소피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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