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0세가 넘은 세그루의 버드나무.
 눈을 뜨면 다섯 시 반이거나 여섯 시 이전이다. 생체의 리듬이 달라졌다. 나이 먹어가는 증거이다. 세상은 급변하는데 내 정신은 그대로고 몸만 급변하는 것을 느낀다. 어릴 적 아버지가 아침 일찍 일어나시는 것이 신기했다. 그보다 먼저 일어나 밭으로 산으로 다니시는 어머니는 상상을 초월했다. 나도 이제 그맘때가 된 것 같다.

 일곱 시 무렵에 아이를 깨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인다. 얼마나 공부에 시달렸을까 놀고 싶고, 하고 싶은 것들을 참아내며, 학교로 학원으로만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들. 그리고 은연중에 그것을 강요하는 부모라는 역할. 가급적 최대한 늦게 깨우고자 하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것들. 해서 비가 지나간 아침에 나는 아이를 깨우는 악역을 버리고 담양으로 떠난다. 그친 비로 세상의 먼지들을 털어내고 연초록의 눈부심으로 단장을 하고 있을 숲을 찾아가고 싶었다.
 
▲출근 전 누리기 충분한 해찰
 
 장소는 광주호와 호수생태원이다. 거기에 돌아오는 길은 무등산의 산장 길로 오면 가장 적격한 드라이브 코스가 완성된다. 여섯 시에 출발해서 호수생태원의 데크를 거닐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리고 이것저것 해찰하다보면 아홉 시 출근에 지장은 없다. 자 떠난다. 아침의 도로는 한산하다. 서구에서 북구로 빠져나와 고개가 아니게 되어버린 도동고개를 넘는다. 과거 도둑들이 있었다고 해서 도둑고개라 불렸던 곳이 이제는 넓은 도로 안에 편재되어 고개가 숫제 사라지고 말았다. 시선을 옆으로 돌려 그곳으로 낚시점을 차리러 들어간 사장님의 안부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망월동을 지나 담양읍으로 가는 길과 창평으로 가는 길 중 창평으로 난 길을 택한다. 보촌 마을쯤 마을 뒷켠의 대밭이 눈에 들어온다. 장마철이 지나 대가 쑥쑥 자랄 때면 그 경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하긴 오동나무가 꽃피울 무렵도 장관이다. 대와 오동나무의 친연성은 봉황이 깃들이는 나무가 오동이고, 먹이가 대나무의 열매인 죽실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소쇄원의 대밭에서 배웠다.

 다시 차는 고서 사거리에서 광주호 방향으로 꺾는다. 포도밭이 연이어 이어지고, 포도밭 마다 상호의 이름이 천차만별이다. 가족의 이름, 가족의 숫자(특히 가족의 숫자에는 딸내미의 숫자가 많이 나온다), 종교, 마을 이름, 벌고 싶은 돈은 액수까지. 가장 원초적인 간판에서 사회의 단면이 읽혀지고, 어느 덧 운현 마을 앞에서는 메타세쿼이아 나무의 사열을 받는다. 그 틈새로 보이는 광주호의 제방은 위용이 대단해 보인다. 원효계곡의 물 자락을 담수한 게 1976년의 일이니 40살도 넘은 나이다. 사열병의 오른편 사이로는 만옹정, 환학정, 관가정, 관수정이 보이고, 왼편으로는 소산정이 보인다. 모두들 유서 깊은 곳이다.

 제방에 오를 무렵, 내가 한 해 동안 머물렀던 수남 학구당도 기와 끝자락이 드러나며 이제 차는 호안을 따라 빙빙 거리며 목적지를 향해 한다. 호수길 곳곳에는 낚시꾼들의 차가 정차 되어 있어 조심하며 가야 한다. 이제 우측으로 무등산이 위용을 드러낸다. 호반산장이라는 곳에서 바라보는 광주호에 잠긴 무등산을 보는 눈맛이 최고지만 이것은 패스다. 아직 옅은 박무 같은 안개가 남아 있다. 어느 때는 짙은 안개가 출렁일 때도 있다. 일부러 그런 날을 택하고 떠날 때도 있지만 오늘은 그런 호사를 부여해 주지 않는다. 자연의 일을 하찮은 인간이 시샘할 순 없는 법. 주어진 여건에 따라 차는 식영정 아래 자미탄을 지나고 충효교 다리는 건너 호수생태원 주차장에 둔다. 광주시의 푸른도시사업소의 사무실이 주차장에 있고, 여기에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에서 의뢰하여 만든 미디어 기반 관광안내소가 입주해 있다. 이곳 일원을 찾는 관광객에게 편의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금년에 문을 연곳이다.

말무덤. 김덕령 장군의 말을 묻어서 말무덤이라는 설과 동네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나쁜 언어는 다 묻어버리고 오라는 언총이 동시에 존재한다.
 
▲1송과 1매와 5류 사이에서
 
 여튼 걸음을 옮겨 충효리 정려비각을 찾아간다. 김덕령 장군과 그 가족의 비분을 달래기 위해 정조는 공에게 좌찬성을 명하고 부인에게는 정경부인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그의 형 덕홍이나 동생 덕보 또한 충과 효에 표상이니 이들이 태어난 석저(돌밑)마을을 충효리 라고 부르도록 마을 이름을 내려 주었다. 그런들 26살의 나이로 상중에 칼을 집어들고 국난을 극복하고자 의병을 일으켰던 김덕령 장군의 넋이 위로가 될까 싶은 의구심이 들지만 국가의 일이란 것이 늘상 그러했지 않나 싶다. 언젠가 이 때문에 신원은 되었어도 해원은 되지 않은 김덕령 장군이라는 글을 쓴 기억도 지나간다.

 정려비각의 안부를 묻고 바로 연초록으로 치장을 한 우람한 왕버들 나무를 만난다. 201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왕버들이 충효동과 한 몸이라고 할 수 있다. 장군의 탄신을 맞아 심었다고 하는 일설도 있고, 풍수 비보를 위해 식재했다는 설도 따른다. 그런데 원래 버드나무는 다섯그루였다. 거기에 소나무 한그루와 매화 한그루도 있었다. 그래서 마을의 상징으로 1송 1매 5류라고 불러졌다. 서쪽을 향해 환하게 뚫려져 있는 마을은 어찌보면 마을의 기운이 지는 해처럼 가뭇없이 사라질 수 있겠다는 회의를 갖게 한다. 거기에 이런 늠름하고 오래가는 버들을 심은 것은 일견 지세로 봐서 비보의 의미가 맞지만 1송과 1매와 5류 사이에 나는 자꾸 도연명을 떠올린다. 귀거래사를 부르며 전원으로 돌아가 더 이상 벼슬살이에 연연하지 않았던 처사 정신의 근원과 같은 인물.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집 앞 뜰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고 스스로를 오류 선생이라고 칭했다고 하지 않는가. 충과 효에 빼어난 이들이 살았던 이곳 마을, 하지만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자 형부터 시작하여 가족이 차례로 의병으로 활동했던 집안. 그럼에도 간악한 권력의 누리들에게 역적의 모함을 받고 왕에게 국문을 당하는 고초 속에 매를 맞아 죽은 김덕령 장군. ‘정녕 그는 오류선생 도연명처럼 세상에 나아가지 않아야 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일고,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운 장군이 있었기에 광주에 충장로가 생겨났고, 충효리가 있고, 충장사가 있지 않을까’라는 서로 등치되는 생각이 이곳에서는 저절로 일어난다.
 
말무덤. 김덕령 장군의 말을 묻어서 말무덤이라는 설과 동네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나쁜 언어는 다 묻어버리고 오라는 언총이 동시에 존재한다.

▲말의 무덤, 언어의 무덤
 
 500세가 넘은 세그루의 버드나무의 번성함을 보며 걸음을 호수 생태원으로 향한다. 영산강 유역의 홍수조절과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4개의 댐이 동시에 들어섰다. 그것이 이곳 광주호와 담양호, 나주호, 장성호이다. 그중에 가장 작은 체급이 광주호인데, 원래는 더 크게 만들고자 했지만 소쇄원, 식영정과 같은 귀중한 문화유산이 수장되거나 수해의 피해 반경에 드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지역민들과 문중의 반대로 이만한 덩치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학선리나 개선동 같은 몇 개의 마을을 삼켰고, 식영정의 명물인 석병풍이나 자미탄, 노자암을 훼손하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삶의 일부로 이곳을 받아들이지만 식영정에서 내려다 보이고, 충효마을에서는 바로 지척인 광주호 상류의 뜨락은 더 이상 농사를 짓지 못하고 농업 기반 공사의 땅이 되고 말았다. 침수구역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왕버들 나무의 후손들이 종족을 퍼뜨리기 시작하고, 농지는 점점 습지가 되어 갔다. 물고기들의 산란장이 되고, 새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친수공간이 부족한 광주시는 이곳에 생태공원을 조성할 계획을 가지고 농업기반공사와 협의를 거쳐 2006년 3월 개장을 하게 된 것이다. 면적은 184,948㎡로 자연관찰원과 학습장, 휴식광장, 수변습지로 구성되어 있다. 습지 지역이기 때문에 습지보호와 관람의 용이성을 위해 데크로 탐방로가 되어 있다. 경사로가 없기 때문에 장애인이 접근하기에도 무리가 없는 탐방 공간이 생태원이다.

 입구에 들어가면 바로 말무덤이 보인다. 안내판은 친절하게 말의 무덤인지 언어인 말의 무덤인지 두가지를 설명하고 있다. 김덕령 장군의 말을 묻어서 말무덤이라는 설과 동네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나쁜 언어는 다 묻어버리고 오라는 언총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실은 언총은 최근에 생성된 말이다. 아무래도 90년대 중반 이곳이 광주시민의 드라이브코스로 각광 받으며 땅값이 들썩 거리고 가든이나 카페와 모텔들이 들어서며 투자자와 지역 주민 사이의 접촉이 많아지고, 누군가는 한몫을 잡고 누군가는 소외되면서 서로 틈들이 벌어지며 하지 않아야 할 상처 깊은 말들이 돌아다녔기 때문 아닐까 싶어졌다.

호수 생태원 탐방로.
 
▲1년 전 감동 재현, 도보다리
 
 푸른도시사업소에서 안내판을 설치할 때 무척이나 고민이 깊은 것을 나는 경험했다. 전국에 언어의 무덤이 있는 곳이 안동을 비롯해 몇곳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당시 중국에 가 계신 전남대학교의 나경수 교수님께 여쭤보니 민속은 죽은 것이 아니라 오늘 현존하는 것도 민속이라고 하시며 지역민이 주창하는 것이라면 그게 살아있는 것이니 말의 무덤과 언어의 무덤 두가지를 담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 속에 그 표지판이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여느곳과 달리 작은 말 무덤에서 살아있는 민속과 만나게 되고 이제 비릿한 내음이 풍겨오는 아침의 생태원으로 들어간다.

 오른쪽 식영정으로 가는 길은 별뫼길이다. 성산별곡이 쓰여진 별뫼가 있으니 응당 별뫼길이 맞다. 봄을 알리는 화사한 꽃들과 인사를 건네고 버드나무 우거진 사이로 길을 간다. 작년 감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도보다리가 나타난다. 남북 정상회담을 기념하기 위해 평화통일을 열망하는 마음을 담아 여기 재현했다고 한다. 딱 일년여쯤 지난 것같은 그날의 일이 마치 바로 내 눈 앞에 있는 듯하다. 그 벅찬 감동의 현실이 꿈이 아니고 바로 뒷단으로 순조롭게 이뤄졌으면 하는 마음을 안고 생태숲의 다른 길로 접어 든다.
전고필<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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