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그물에 잡힌 ‘의미’에 대하여
언어의 바다, 항해자께 필요한 것

▲ 그는 웃고 또 웃었다. 이제 달라질 거야. 그는 이제부터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페터 빅셀, ‘책상은 책상이다’
 “이제 모든 것이 달라질 거야.” … “언제나 똑같은 책상, 언제나 똑같은 의자들, 똑같은 침대, 똑같은 사진이야. 그리고 나는 책상을 책상이라고 부르고 사진을 사진이라고 하고, 침대를 침대라고 부르지. 또 의자는 의자라고 한단 말이야. 도대체 왜 그렇게 불러야 하는 거지? 어째서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지 않느냔 말이야.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다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웃고 또 웃었다. 이제 달라질 거야. 이렇게 외치면서 그는 이제부터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 페터 빅셀, ‘책상은 책상이다’
 
 당신은 너른 바다 위 항해자. 저 멀리 시선을 던지면 푸른 수평선이 언제나 아름답게 반짝인다.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거고, 어쨌든 사람은 물고기를 먹어야 산다. 조각배 밑으로 그물을 던지면 수많은 물고기들이 딸려들어 온다. 하지만 당신이 먹어야 할 어종은 딱 몇 가지로 정해져있다. 매일 같은 물고기를 먹고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삶. 인생이 이게 전부라면 누구든 미쳐버릴 것이다. 당신에겐 특별한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독특한 빛깔을 내는 조개껍데기나, 소금물에 빛바랜 사진 같은 것.

 ‘의미’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전은 의미를 이렇게 정의한다. 1. 말이나 글의 뜻. 2. 행위나 현상이 지닌 뜻. 3. 사물이나 현상의 가치. 따라서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정의’로서의 의미와 ‘가치’로서의 의미. 1과 2는 전자고 3은 후자다. 예를 들면 인생의 정의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렇게 의미를 두 가지로 구분해 설명했지만, 대부분 정의가 곧 가치가 된다. 말하자면 책상은 기어코 책상이니까. 가장 큰 값을 부르는 정의는 사전에 적혀있다. 그러나 항해자는 때로 믿고 싶다. 정의 밖의 것들이 그만의 가치를 발할 때가 분명 있다고.
 
 “그들의 문자는 전방향이나 역방향이 없다. 언어학자들은 이것을 비선형 철자법이라 부른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그들은 생각을 이런 식으로 하는가? 문장을 쓰는데 문장의 앞과 뒤부터 쓴다고 상상해보라. 어떤 단어들을 쓸 지도 알아야 하고 각 단어가 차지할 공간도 알아야 한다.”
 - 드니 빌뇌브, ‘컨택트’
 
▲‘정의’ 밖 것들이 가치를 발할 때
 
 어느 날 지구 곳곳에 열두 개의 미확인 비행물체가 나타난다. 거대한 검은 쉘 속 일곱 개의 발이 달린 외계인들은 마찬가지로 검고 커다랬고, 무엇보다 말이 안 통했다. 기껏 와놓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외계인들 덕에 전 세계는 큰 혼란에 빠지고 곧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팀이 꾸려진다. 언어학자 루이스와 과학자 이안의 과제는 그들에게 ‘왜 여기에 온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는 것. 그러나 지구인의 언어와 외계인의 언어는 아주 달랐다. 외계인들은 말을 하지 않고 시각언어만을 사용한다. ‘쉭!’ 하고 내뿜는 동그란 모양의 검은 기체가 그들의 문자. 시작과 끝이 없는 그들의 언어는 그래서 시제가 없다.

 인간들은 원을 여러 조각으로 잘라 의미를 파악해 나간다. 서로의 언어를 배우는 고투 끝에 문장 단위의 소통이 가능해지자 인간측이 묻는다. ‘왜 여기에 왔나?’ 외계인들은 간단히 답한다. ‘무기를 준다.’ 단 한마디로 본부는 발칵 뒤집힌다. 루이스는 그들이 말한 무기가 그저 ‘도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설명하려 애쓰지만, 오역이 초래할 결과는 끔찍해 보인다. 언어는 다루기 복잡한 무기다. ‘무기’라는 단어는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를 함께 내포한다. 무기를 쥔 손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열리고 마는 것이다. 핵개발 후 시한폭탄이 된 지구의 운명을 보라. 핵보유국이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됨과 동시에 모든 국가는 일종의 운명 공동체로 엮였다.
 
 “침대는 사진이라고 불렀다. 책상은 양탄자라고 불렀다. 의자는 시계라고 불렀다. 신문은 침대라고 불렀다. 거울은 의자라고 불렀다. 시계는 사진첩이라고 불렀다. 옷장은 신문이라고 불렀다. 양탄자는 옷장이라고 불렀다. 사진은 책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사진첩은 거울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이렇게 되었다.” … “아침에 이 나이 많은 남자는 오랫동안 사진 속에 누워 있었다. 아홉 시에 사진첩이 울리자 남자는 일어나서, 발이 시리지 않도록 옷장 위에 올라섰다. 그는 자기 옷들을 신문에서 꺼내 입고 벽에 걸린 의자를 들여다보고, 양탄자 앞 시계 위에 앉아 자기 어머니의 책상이 나올 때까지 거울을 뒤적였다.”
 - 페터 빅셀, ‘책상은 책상이다’
 
▲언어에는 명백하게 계급이 있으니
 
 언어는 선물이자 무기다. 신 혹은 자연이 인간에게 준 선물은,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자 나를 보호하는 방패로 쓰이며, 종국에는 남을 공격하고 남의 것을 빼앗는 무기가 된다. 언어를 많이 쥔 사람일수록 큰 힘을 쥔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게 다라면 라퓨타에 사는 이상한 종족처럼 다들 보따리에 말을 닥치는 대로 가득 지고 다녔을 테다. 말하자면, 언어에는 명백한 계급이 있고 그에 따른 권력차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어 하나만을 모국어로 가진 사람, 5개 국어나 할 줄 아는데 영어는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 누가 더 센 무기를 가졌나? 질문의 답이 전자라는 것쯤 지구인이라면 누구나 안다.

 이런 형편의 별이니 외계인이 선물을 주어도 무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선물이라는 말조차 지구는 아직 과분한지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 모두 알게 될 것이다. 헵타포드의 선물은 핵무기 따위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이라는 걸. 언어가 변하면 사고도 변한다. 직선의 언어에서 원의 언어로 옮겨간 우리가 세상을 직선이 아닌 원으로 보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얻을 것과 잃을 것은 무엇일까? 그럼에도 단언컨대 우리를 더 나은 차원으로 진화시킬 것, 그것은 또 무얼까. 그때쯤 루이스는 환영을 보기 시작한다.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어린 여자 아이. 이 아이는 누구지?
 
 “외국어를 배우는데 몰두하면 실제로 뇌 회로가 재구성 된대요.” “저도 들었어요. 가설이죠. 그 이론에선, 말하는 언어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이 결정돼요.” “네, 세상을 보고 느끼는 것도 달라지죠. 궁금한데, 당신 혹시 꿈도 그들 언어로 꾸나요?”
 - 드니 빌뇌브, ‘컨택트’
 
 중국은 자국민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쉘을 향한 발포를 명령하고 지구의 미래는 점차 부정적인 쪽으로 나아간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루이스는 축하파티에서 중국 국방장관과 만나는 자신을 본다. 그는 루이스의 귓속에 아내의 유언을 속삭인다. ‘전쟁은 과부만 만들 뿐이다.’ 루이스가 무전기에 대고 들은 대로 외친 그 한마디에 수상은 마음을 바꾸고 즉시 모든 무력행위가 중단된다. 거짓말처럼 평화는 오고 열두 개의 쉘은 지구를 떠난다. 왜 지구에 왔는지 끝내 알려주지 않은 채, 맞춰야 할 열두 개의 퍼즐을 남겨두고. 헵타포드는 루이스에게 말한다. 언젠가 당신들은 우리를 돕고, 우리도 당신을 돕는다. 그리고 덧붙인 한마디. ‘루이스는 무기를 얻는다.’

지구 곳곳에 열두 개의 미확인 비행물체가 나타난다. 인류는 외계인들이 온 이유를 밝혀야 한다. 드니 빌뇌브, ‘컨택트’
 
▲직선 세상에서 동그라미 사는 ‘고립’
 
 무기는 ‘무언가를 지키는 도구’다. 지구인들은 우둔하고 딱딱한 방법으로 자신들을 지키려 행동했다. 그렇다면 헵타포드는 루이스에게 좀 더 고차원의 방법을 알려준 걸까? 하지만 아무 권력도 없는 이방의 언어가 어떻게 나를 지킬 수 있나. 루이스는 결국 고립된다. 지독히 외로워진다. 시간에 대한 통찰을 얻은 그녀는, 원의 궤적을 타고 날아가 모두 보았다. 딸은 일찍 죽고 남편은 끝끝내 이해하지 못하고 떠난다. 그러나 그녀는 묵묵히 따를 뿐. ‘모든 게 실만은 아니야.’ 하고 생각했을까. 기쁨이 도착하는 순간도 사랑이 피어나는 순간도 올 테니. 내가 분명 보았으니. 풀밭 위를 달리는 작은 장화를, ‘사랑해’ 라 속삭이는 예쁜 얼굴을. 그러니 잃을 지라도.
 
 “이제 모든 것의 이름이 달라졌다. 그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사용했다. 어느새 그는 이 새로운 언어로 가끔 꿈을 꾸곤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말았다. 누군가가 내일 선생님도 축구 보러 가실 건가요? 하고 말하면 그는 큰소리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 “남자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그건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사람들이 그를 더 이상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했고, 자기 자신하고만 이야기했고, 더 이상 인사조차도 하지 않게 되었다.”
 - 페터 빅셀, ‘책상은 책상이다’
 
 헵타포드의 언어는 직선에 갇힌 루이스의 사고를 열었다. 그녀는 삶의 의미를 스스로 발견한 아름다운 조개껍데기에서 찾았다. 언어가 어떻게 나를 지키는 무기가 되냐고? 답은 조개껍데기에 있다. 누구도 발견 못한 이름 모를 샘에 첫발을 담글 때의 짜릿함.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희귀한 조약돌을 주울 때의 기쁨. 들리는 모든 말에 웃음을 터뜨리게 된 남자처럼 그녀는 웃는다. 그녀는 자신이 고립됨과 동시에 세상 모두를 고립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어찌 보면 파괴적인 결말. 루이스의 고독은 필연이었다. 그러나 한 번 뜬 눈을 다시 감지는 못한다. 그녀는 자신을 매료시킨 것의 치명적인 달콤함을 안다.

 모두가 직선을 사는 곳에서 홀로 동그라미를 사는 자에게 주어질 결말은 고립밖에. 이제 그 누구도 루이스를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 눈앞에 선 이 남자조차도. 하지만 눈을 뜬 그녀에게 달리 갈 곳은 없었고, 그래서 그녀는 둘 다 받아들였다. 직선의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것, 그리고 완벽한 동그라미의 삶에 결국은 실패하는 것. 헵타포드의 선물을 받았지만 헵타포드가 되지 못한 루이스가 가엾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딸이 떠나갈 때 그녀는 다 알면서도 울었다. 그러나 실은 모든 인간은 이런 존재고 모든 인생은 이런 이야기 아닌가. 다들 죽을 걸 알면서도 살잖아. 헤어질 걸 알면서도 사랑하고.

모두가 직선을 사는 곳에서 홀로 동그라미를 사는 자에게 결말은 고립밖에 없다. 루이스는 직선의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것도, 완벽한 동그라미의 삶에 실패하는 것도 다 받아들였다.
 
▲책상은 아무리 발악해도 책상이다
 
 “만약 당신이 인생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알게 된다면, 뭔가를 바꾸시겠어요?” “아마도, 느끼는 걸 더 자주 말하려 하겠죠. 잘 모르겠네요.” … “이때가 네 이야기가 시작된 날이야. 그들이 떠난 날이지.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어떻게 흘러갈지 알면서도, 난 그 모든 걸 떠안았단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반길 거야.”
 - 드니 빌뇌브, ‘컨택트’
 
 ‘우린 시간에 얽매여 있어.’ 그녀는 딸에게 말한다. 직선과 원 사이를 헤매는 존재가 인간이다. 출발과 동시에 앞으로 계속 달려가다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직선. 부드럽게 커버를 그리며 시작과 끝이 만나는 영원한 운동을 하는 둥근 원. 똑똑한 머리는 무리 없이 원을 이해하는데 멍청한 몸은 정직하게 직선을 따른다. ‘시간에 얽매여 있다’는 말은 ‘언어에 얽매여 있다’는 말로도 통한다. 직선의 언어에서 직선의 사고가 나오나? 아니면 애초에 인간은 직선의 사고밖에 할 줄 모르나? 닭이 먼저건 달걀이 먼저건. 우리의 사랑은 채도가 높고 우리의 어리석음은 너무도 선명하다.

 스물한 살에 엄마가 떠났다. 벌써 오년이 훌쩍 지났다. 루이스와 딸의 이별을 보며 상상한다. 미래를 알았다면 난 어떻게 했을까, 당신을 더 사랑했을까? 만약 내가 당신보다 먼저 죽을 운명이었고 그걸 당신이 알았다면. 그래도 틀림없이 당신은 날 만나러 왔겠지, 루이스처럼.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이 죽는 걸 알고도 나를 만나러 왔을까? 솔직히 모르겠다. 난 이제 당신의 사랑을 맹신하지 않는다. 사랑의 크기를 어림잡는 짓도 안 한다. 단 한 가지만이 명백하다. 당신이 미래를 모르는 몸으로 나를 만나러 왔다는 사실. 이 미지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나를 존재케 한 그 가엾기도 위대하기도 한 선택이 고맙고 또 미안할 뿐.

 사랑한다. 보고 싶다. 가만히 속삭이면, 입 안에 굴려보면, 느껴진다. 말들의 채도는 한층 낮아졌고 더욱 선명해졌다. 내게 그리움은 또 사랑은 당신으로 인해 다른 의미가 되었다. 인간이 영원히 살 수도 시간을 거스를 수도 없듯 의미 또한 마찬가지다. 영원한 의미는 어디에도 없으나 한번 태어난 의미는 쉽게 죽지 않는다. 팽창하거나, 응축되거나, 조용히 닳아갈 뿐. 닳아 움푹 팬 곳에 어느새 밀려와 빈자리를 새로이 채우는 것들. ‘사랑일 거야.’ 나는 중얼거린다. 그리고 바란다. 루이스의 ‘예스’가 단지 운명에 대한 순응이 아니었듯, 당신도 나와의 만남을 택해서 얻은 게 있었기를. 그것이 당신에게 보람과 행복을 주었기를. 내가 당신에게 그런 의미였기를 바란다.

 책상은 죽었다 깨나도 책상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들은 드넓은 바다를 부유하다 우연의 파도를 타고 내가 던진 그물 안에 들어온다. 용케도 성긴 구멍 속으로 들어와 결국 내 것이 되고야 만다. 독특한 빛을 내는 작고 희귀한 조개껍데기처럼, 쉽게 버리지 못하고 주머니에 넣어 꺼내보게 하는 것. 지갑에 끼워놓은 빛바랜 당신의 사진같이, 오래도록 깊이 간직하게 하는 것. 하지만 물고기를 안 먹으면 죽는다. 바다 한 가운데서 사진만 백날 보고 있어도 죽는다. 특별한 의미만을 찾아 헤맨다면 그래서 생존에 실패할 것이다. 따라서 책상은 내가 아무리 발악해도 책상이다.
 
▲물고기만 먹는 삶, 다른 의미의 죽음
 
 만물의 이름과 의미를 자기 마음대로 뒤틀어버린 늙은 남자는 결국 외톨이가 되었다. 이방의 말을 온몸으로 흡수한 루이스는 인생 자체의 의미가 송두리째 바뀌어버렸다. 루이스와 남자를 고립시킨 언어는 이토록 냉엄하다. 그러나 언어가 없다면 생존도 없다. 의미가 없다면 존재도 없다. 우리는 물고기와 조개껍데기 둘 다 필요하다. 남자는 물고기를 먹지 않고 오로지 조개껍데기가 주는 의미에만 골몰하다 굶어 죽었다. 그건 루이스도 마찬가지. 하지만 결말을 알아버린 그녀는 인생의 다른 의미를 애써 발견하고 끌어안았다. 루이스는 죽지 않았다.

 가엾은 항해자들. 광활한 바다를 가르면서도 매번 잡는 물고기만 잡는다. 그러나 파도 밑에 분명 그들을 꿈꾸게 하는 것들이 헤엄친다. 이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항해술이 필요하다. 언어는 선물도 무기도 될 수 있다. 그 결과는 도약일수도 파멸일수도 있다. 루이스는 행복해졌나 불행해졌나? 알 수 없다. 직선이든 동그라미든, ‘가치판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게 인생이 가진 의미니까. 확실한 것은 물고기만 먹는 삶은 다른 의미로 죽음이라는 것이다. 작은 의미들이 모여 내가 된다. 물고기도 조개껍데기도 나를 만드는 원료다. 책상은 내가 보고 불러야 비로소 책상이다.
김연우 <조선대 국문과 4년, 인문학공간 소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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