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내 삶처럼

▲ 민화 토끼와 거북.
 오르막길이
 배가 더 나오고
 무릎 관절에도 나쁘고
 발목이 더 굵어지고 종아리가 미워진다면
 얼마나 더 싫을까
 나는 얼마나 더 힘들까
 
 내가 사는 동네에는 오르막길이 많네.
 게다가 지름길은 꼭 오르막이지
 마치 내 삶처럼
 
 - 황인숙 ‘내 삶의 예쁜 종아리’
 
▲인간, 상징하는 동물

 문화 철학자 카시러는 “인간은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했다. 상징은 인간의 생각과 경험을 대체하여 표현한 기호, 이미지 혹은 어떤 형식의 체계다.

 수저를 거꾸로 들고 거울 앞에 서서 흥얼흥얼 어깨를 들썩이는 조카에게 “가수가 됐구나!” 짐짓 놀라는 표정으로 외쳤다. “흥, 아니에요. 나 지금 아나운서란 말이에요.” 아이는 콧등을 살짝 찡그리더니 무안했던지 쪼르르 제 방으로 달려 들어간다. 오랜만에 만난 천사 같은 조카에게 점수 좀 따보려던 나의 얄팍한 전략은 무참하게 무너졌다. 이 모든 사단이 ‘상징’탓이다. 어린 조카와 내가 수저에서 마이크를 연상한 것까지는 무사통과. 그러나 아이는 마이크를 아나운서의 상징으로, 나는 가수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이렇듯 상징은, 다층적이며 다의적이다. 당연히 한 상징물이 갖는 의미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며 때로는 옛 의미가 해체되고 새롭게 재구성된다.

 카시러는 법과 제도, 건축, 음악과 미술과 언어가 모두 당대 인간 사유의 상징이라고 주장했다. 그중에서도 신화야말로 상징의 시초라고. 가령 프로메테우스는 어떤가. 고대 그리스의 티탄신이던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게 불을 훔쳐다 인간에게 준 벌로 3000년간 코카서스 벼랑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먹힌다. 그리스인은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어떤 인간형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오늘날 누가 약자를 대신해 강력한 권력 제우스에 맞서는 프로메테우스적 결기를 보여주는가.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나는 왜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태동했는지 그 의미를 짐작하고 이해한다.

 그리스에 프로메테우스가 있다면 조선에는 ‘토끼’가 있다. 판소리로 한글 소설로 인구에 회자되던 ‘토끼전’의 그 토끼. 토생원은 프로메테우스의 민중적 변형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삼촌뻘로 태생부터 고귀한 신의 혈족이었다. 그는 창조물인 인간을 돕기 거부하는 제우스의 무자비함을 질타하며 “악한 일을 하라는 게 자유인가? 너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자유 말이냐? 지금은 팔과 다리에 족쇄가 채워져 있어도 나는 너 제우스보다 자유롭다.”고 외친다. 그의 굽히지 않는 정신은 아버지 크로노스의 횡포에 대항해 일어났던 젊은 제우스의 정신과 맥이 닿아있다. 그러나 시간이 영롱한 정신을 녹슬게 하듯 무소불위의 권력은 부패한다. 그렇다면 바다의 우두머리 용왕이 간절히 찾아 헤매는 토끼와 자라는 어떤 인간형의 상징일까? 제우스 독수리와 용왕은 왜 프로메테우스와 토끼의 간을 원하는가. 간도 상징이다.

마티스의 ‘이카루스’.

 고전에 깃든 상징은 그 시대 집단지성 혹은 염원을 보여준다. 시장에서 불리던 토끼전은 두 번의 양난으로 혼란일색이던 조선 백성들이 꿈꿀 수 있는, 실천 가능한 영웅의 모습이었다. 큰 아이는 사냥꾼이 놓은 덫에 걸려 죽고 둘째 아이는 여염집 토끼장에 갇혀 먹힐 날을 기다리는 처연한 현실에 눈물짓지만 결코 우울과 자기 비하에 빠지지 않는 홀아비 토생원. 자라와의 삼판 승에서도 사지에 내몰린 용왕 앞에서도 비록 간 졸아들지언정 움츠리지 않고 의연한 토끼의 모습은 가진 것 없는 민초적 영웅 바로 그것이다. 토생원은 일찍이 시인 김수영이 쓴 시 속 ‘풀’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 ‘풀이 눕는다’
 
▲상징은 대립한다

 더불어 ‘간’은 재생과 부활의 상징이다. 밤낮 가리지 않고 음주가무와 주색을 일삼다 큰 병이 든 용왕은 프로메테우스의 눈에 비친 제우스와 다르지 않으며 두 신급(神級) 지배자의 육체의 병과 정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필요한 건 굽히지 않는 생명력, 간의 힘이다. 이렇듯 동서양을 아울러 두루 비슷하게 통용되는 상징은 인간 무의식의 원초적 상을 보여준다.

 때로는 한 상징물 안에서 두 의미가 서로 대치하는 일도 있다. 크레타왕의 명령을 어겨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에 갇힌 아버지 다이달로스와 아들 이카로스. 둘은 갈매기 깃털과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하늘 로 날아오른다. 태양이다! “인간은 결코 날 수 없다.”는 신들의 불문율을 어기고 이카로스가 나는 장면을 동시대를 산 두 화가, 샤갈과 마티스가 그렸다. 그림에 드러난 이카로스 신화에 대한 두 화가의 관점은 다르다. 샤갈은 분수를 모르고 덤빈 오만의 쓰디쓴 결과를 드러내기 위해 추락하는 이카로스를 그렸다. 마티스의 이카로스는 푸른 하늘을 유영한다. 그는 그림을 통해 이카로스의 새로운 상징을 제안한다. ‘모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너는 어디 한번이라도 날기를 시도해 보았느냐. 인간은 날지 못한다는 날아서는 안 된다는 금기는 누가 정한 것이냐.’

샤갈의 ‘이카루스’

 기존의 상징을 해체하고 의미를 내가 재구성하며 사는 삶은 예술적이다. 고개를 들면 도처에 기업과 시장이 만든 상징이 범람한다. 브랜드라는 상징, 아파트와 자동차라는 중산층의 상징, 정치적 보수와 진보의 상징. 다수에 노출되어야하는 연예인과 정치인은 스스로 문화의 아이콘-상징이 되기를 자처하고 매스컴과 매체는 어제의 상징을 오늘의 새로운 상징으로 지우며 기삿거리를 찾아 구석구석을 누빈다. 난무하는 상징 속에 상징은 없다. 토끼전과 프로메테우스가 수백 수천 년을 넘어 여전히 새롭게 다가오는 건 고전이 겹겹의 상징을 담고 있어 읽는 이에게 마다 생각할 미끼를 던지기 때문이다. 어떤 베스트셀러가 앞으로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까. 가벼운 위로와 해결책을 제안하는 팔리는 책들이 값어치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누가 있어 시간을 넘어 미래의 독자들과 조우할 것인가. 과거와 미래를 잇는 미지의 길을 걸을 것인가. 고전의 매력과 마력은 알 수 없음, 아득한 상징의 깊이에 있다.
박혜진 <문예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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