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가서 놀자.” “응. 우리 같이 놀자.”

▲ 아이는 빨간 나르는 양탄자를 타고 날아갑니다.
 아이들이 사는 시설의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본 주하는 저쪽에서 달려와 나를 꼭 끌어안는다. 그리고 교실에 들어와서 의자에 앉자마자 오늘도 ‘우리 놀아요!’라는 말을 한다. 내가 일주일 중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한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시간에 쫓긴다. 아이들과 나누려고 준비한 이야기가 한 시간 안에 끝나져서, 아이들과 조금이라도 놀 시간이 나올지 오늘도 장담할 수가 없다. 시원하게 ‘그래.’라고 대답하지 않는 나에게 아이들은 간절한 눈빛을 보낸다. 순간 마음이 흔들린다. ‘오늘 할 공부는 다음에 해도 되지, 뭐!’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이곳까지 왔는데, 안 하고 가면 안 되지. 아이들이 놀자고 할 때마다 놀 수는 없어.’라는 단호한 마음도 들었다가, 마음이 갈팡질팡이다.
심심한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는 빨간 색연필을 하나 발견합니다.
 
▲같이 놀아요

 여기 심심한 아이가 한 명 있습니다.

 이 아이는 공원에서 혼자 퀵보드를 타보지만 별로 재미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엄마는 요리를 하면서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느라 바쁘십니다. 아빠와 연을 날리고 싶어 가보았지만, 아빠는 컴퓨터를 보며 일을 하느라 바쁘십니다. 공을 가지고 언니와 놀고 싶어서 가 보았지만 언니는 핸드폰을 하느라 바쁩니다. 아이는 방에 들어와 가만히 침대에 앉아있습니다. 가만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자울자울 졸고 있는 고양이처럼 가만히 앉아있습니다. 그러다가 방에 있는 빨간 색연필 하나를 발견합니다. 아이는 빨간 색연필을 들고 벽에 문을 하나 그립니다. 그리고 그 문을 찰칵!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은 하늘로 쭉쭉 뻗어 자라는 나무들이 있는 울창한 숲이었습니다. 그 숲에는 반짝반짝 별처럼 빛나는 등불이 곳곳에 켜져 있습니다. 아이는 아름다운 숲을 걸어봅니다. 흙냄새, 풀냄새, 이끼냄새, 숲의 냄새가 아이에게 밀려옵니다.

 아이는 또박또박 숲을 걷다 시내를 만납니다. 아이가 시내를 건널 수 있는 다리는 시내의 중간쯤에서 끊겨있습니다. 아이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빨간 색연필로 빨간 배를 그립니다. 그리고 아이는 그 빨간 배를 타고 시내를 흘러갑니다. 시내는 흘러흘러 커다란 마을로 흘러갑니다.(닿았습니다.) 이 시냇물은 마을의 수로로 마을 사람들의 길이 됩니다. 마을의 보초병들은 빨간 배를 타고온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합니다. 수로를 타고 아이는 마을 이곳저곳을 여행합니다. 그런데 이런! 수로가 저 앞에서 뚝 끊겨져 있습니다. 아이는 그만 시냇물과 같이 아래로아래로 떨어집니다. 어떻게 하죠? 아이는 빨간 색연필로 공중에 동그라미를 그립니다. 빨간 동그라미는 어느새 열기구가 되었습니다. 아이는 빨간 열기구를 타고 하늘로 둥실둥실 날아올랐습니다. 하늘높이 떠있는 구름이 아이의 눈앞에 깔릴 정도로 높이 올라갔더니, 그곳엔 배의 몸체와 비행기의 꼬리와 기차의 굴뚝을 가진 거대한 물체가 구름 위를 날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군사들이 열기구를 타고 다니며 긴 꽁지를 가진 보라색 새를 잡으려고 쫓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라색 새를 잡아서 그들의 황금새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아이는 살금살금 보라색 새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보라색 새를 가두고 있는 황금새장을 가지고 도망쳤습니다. 아이는 황금새장 문을 열어 갇혀있는 보라색 새가 다시 자유롭게 날도록 날려주었습니다. 아이는 군사에게 잡혀 보라색 새 대신 공중에 매달린 커다란 새장에 갇혀버렸습니다. 어떻게 하지요? 어디선가 보라색 새가 날아왔습니다. 보라색 새 부리에는 빨간 색연필이 물려있었지요. 아이는 다시 그림을 그립니다. 무엇을 그렸을까요? 나르는 빨간 양탄자! 아이는 나르는 빨간 양탄자를 타고 갇혀있던 새장에서 빠져나와 보라색 새의 안내를 받으며 나풀나풀 날아갑니다. 아이는 보라색 새의 몸처럼 보라색인 문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보라색 새와 함께 그 문을 딸깍 열고 그곳을 나갑니다. 보라색 문의 반대편에는 보라색 색연필을 든 한 아이가 서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보라색 새를 그린 아이인 것 같습니다. 빨간 색연필을 든 아이와 보라색 색연필을 든 아이는 각각 보라색, 빨간색 동그라미를 하나씩 그립니다. 그리고 그것은 금세 보라색 앞바퀴, 빨간색 뒷바퀴를 가진 자전거가 되었답니다. 빨간색 색연필을 든 아이는 자전거 앞에 앉았습니다. 보라색 색연필을 든 아이는 빨간 바퀴가 있는 뒤쪽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둘이 함께 자전거를 굴립니다. 이제 아이들은 혼자가 아니라 둘입니다. 아이가 이야기합니다.
 “우리 저기까지 가 볼까?”

 “그래.”

-‘머나먼 여행’
그곳에 나무들이 울창한 아름다운 숲이 있었습니다.
 
▲그래. 같이 놀자
 
 오늘은 기필코 시간을 내어 아이들과 놀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뭐하고 놀까?”“달리기요.”
 “달리기?”
 
 운동을 극도로 싫어하고, 움직이는 것을 최대한 삼가는 나에게 달리기라니! 난감하다. 달리기를 하자고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순간 또 고민하는 내 마음을 읽은 걸까? 주하는 내 팔에 매달리며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우리 같이 놀아요. 달리기가 얼마나 재미있는데요.’라고 말하며 나를 설득한다.
 
 “그래. 하자! 달리기.”
 
 주하가 출발선을 긋는다. 그냥 길이었는데, 주하가 돌멩이로 손을 긋고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로 선표시를 하자, 길이 ‘출발!’하는 신호가 없으면 절대 먼저 발을 내딛어선 안 되는 공간과 ‘출발!’ 신호를 기다리며 잔뜩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 공간, 둘로 나뉘어 졌다. 주하가 규칙을 친구들과 나에게 설명한다.

 ‘이 선에서 출발하는 거야. 그리고 저기 대문까지 뛰어가서 대문 짚고 다시 여기로 돌아오면 돼. 먼저 이 선에 들어오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그런데 저기 대문에서 돌 때 꼭 손으로 대문을 짚어야 해. 대문을 짚지 않으면 반칙이야. 알았지? 선생님, 알았죠?’

 “응. 그럼 ‘출발’ 신호는 누가 해?”

 “하고 싶은 사람“ 없어“ 그럼 가위바위보로 정해.”

 규칙을 서로 확인하고 필요한 역할을 맡고, 달리기 시합이 시작됐다. 준석이가 심판이 되었다. 준석이는 달리고 싶었지만 가위바위보에 졌으니, 이번에는 순순히 심판을 하기로 했다.

 “출발!”

 준석이가 ‘출발’ 하고 신호를 하자마자 아이들이 뛰었다. 정말 최선을 다해 뛴다. 나도 최선을 다해 뛰었다. 주하가 먼저 대문에 짚고 돌았다. 그 다음은 내가 돌았다. 그 뒤로 진영이가 돌았다. 그 뒤로 막내 소연이가 돌았다. 주하가 제일 먼저 도착점에 들어왔다. 주하 얼굴에 웃음이 핀다. 진영이랑 소연이는 들어와서 역시 학년에서 제일 빠른 주하를 따라 잡을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한다. 이 말을 듣는 주하는 은근 내 앞에서 뽐내고 싶지만 또 좀 부끄러운 표정을 하고 서 있다. ‘주하야, 우와 엄청 빨라. 짱이야.’ 라고 이야기 해 주니, 주하는 더 환하게 웃는다. 달리기는 계속 되었다. 뛰는 상대를 바꾸어가며 달렸고, 심판도 바꾸어가며 보았다. 아무 도구도 없이 내 몸 하나만으로 하는 달리기가 이렇게 재미있는지 처음 알았다.
아이는 빨간 동그라미를 공중에 그렸습니다.
 
▲아이들은 틈만 나면 놀고 싶어 한다
 
 내가 근무하는 학원에서도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면 밖으로 몰려 나간다. 학원 현관 앞에 약 150미터정도 되는 복도가 있는데, 그곳이 아이들에게 놀이공간이 되었다.
 
 오늘 아이들이 하고 있는 놀이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이다. 처음에 이 놀이를 할 때는 가위바위보로 술래를 정해 놓고도, 자신이 술래를 하겠다고 우기는 아이가 나와서 놀이를 진행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놀이를 몇 번 해 보더니 아이들은 이제 가위바위보 규칙을 잘 수긍한다. 그리고 가끔은 술래가 안 돼서 속상해 하는 친구가 있으면, 일부러 먼저 잡아서 그 친구를 술래로 만들어 주는 깜찍한 배려도 보여준다. 아이들이 하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아이들이 가진 자유로움으로 변형되었다. 무궁화꽃을 많이 피웠다고 생각했는지. 아이들은 ‘해바라기 꽃이 피었습니다.’, ‘할미꽃이 피었습니다.’, ‘스파이더맨꽃이 피었습니다.’, ‘호랑이꽃이 피었습니다.’라고 외친다. 아이들은 피어지는 꽃에 따라 다른 몸짓을 취한다. 아이들이 ‘선생님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칠 때면 나도 모르게 긴장한다. 아이들이 선생인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포즈로 딱 나오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얼음, 땡!’ 놀이도 한다. 술래에게 잡힐 것 같으면 재빨리 ‘얼음’이라고 외쳐서 자신을 보호한다. 그리고 친구가 얼음이 되어 있는 자기를 깨워주기를 기다린다. ‘제발 제발 제발’. ‘여기 여기 여기’ 아이들은 간절한 눈빛도 보내고 목소리를 내어 친구에게 도움을 청한다. 친구는 술래를 피해서 얼음이 된 친구의 얼음을 깨준다. 아이는 자신에게 다가와 자신을 가볍게 터치해주는 친구의 손길이 고맙다. 친구의 손에 의해 얼음에서 풀려난 아이는 또 얼음이 되어 있는 친구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친구의 얼음을 깨어준다.

 아이들은 벽과 벽 사이 공간을 가지고서도 잘 논다. 아이들이 ‘허수아비’ 놀이를 하면 보고 있는 엄마들은 눈이 점점점점 커진다. 왜냐하면 아이가 바닥을 기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술래는 벽과 벽 사이에 서서 다른 아이들이 이 통로를 자신의 몸을 닿지 않고서는 지나가지 못 하도록 자기 몸으로 그물을 만든다. 이 때 술래는 한 번 만든 동작으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놀이이름이 ‘허수아비’이다. 술래가 허수아비가 되면 다른 아이들은 허수아비를 닿지 않고 허수아비 앞에서 뒤로 지나갈 공간을 찾는다. 아이들끼리 이쪽이 더 넓다. 이런 동작으로 통과하면 지나갈 수 있다 등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서로 생각을 나누라고 지시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듣고 의견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직접 시도한다. 앞 친구가 통과하면 뒤의 아이들도 쾌재를 부르며 그 길을 선택한다. 하지만 앞 친구가 그 길로 성공했더라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체조건이 각자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신체조건에 맞는 통과통로와 방법을 찾아 도전하기도 한다. 술래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지나갈 수 있는 큰 공간이 생겨나지 않을까 궁리하면서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아이들 신체의 유연성과 결단의 용감함과 몰입력이 올라간다.

 ‘고무줄 놀이’를 할 때만큼은 아이들이 제발 나를 찾지 않기를 바란다. 내 마음 속에서 나는 폴짝폴짝 뛰고 있지만,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몸도 무거워지고, 관절도 약해져서 고무줄을 뛰어넘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고무줄을 뛰어 넘을 때 어떤 아이들은 유독 몸의 균형을 잘 잡지 못해 비틀거리고, 뛸 때 생각과 몸의 협응이 생각만큼 이루어지지 않아 엉성한 동작을 만들어내는 아이들이 있다. 중심잡기와 동작이 불안하면 아무래도 고무줄을 자주 밟게 되고 그러면 다른 친구들이 이 아이의 몫을 살려줘야 하는 일이 생겨난다. 이런 친구와 한 편이 되면, 자기편이 불리하다고 생각해서 싫어하고 귀찮아 하는 아이들이 생겨날 법도 한데, 아이들은 귀찮기는커녕 친구의 몫을 살려줄 기회를 얻었다고 좋아한다. 그리고 서로 친구의 몫을 살리겠다고 야단법석이다. 한 번이라도 더 뛰고 싶은 마음에서 그러기도 하겠지만 또 한 편으로는 자신이 친구를 구해줬다는 뿌듯함이 들기 때문인 것도 같다. 자기편이 뛸 때면 옆에서 응원을 한다. 성공하면 잘 했다고 서로 격려하고 칭찬한다. 단계가 올라갈수록 아이들의 도전 의식은 높아지고, 아이들의 성취감 또한 올라간다.

 아이들이 하는 놀이는 정말 다양하다. 처음 보는 놀이를 만들어 놀기도 한다. 아이들은 놀이를 하며 규칙을 배우고 규칙을 실천하는 경험을 갖고, 놀면서 오가는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능력도 키운다. 또 승패놀이에서는 졌을 때 인정하는 자신의 감정 제어능력도 키우고, 친구들과 함께 협동하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해결해 보는 협동과 협력의 경험과 긍정적 태도를 키운다. 그리고 자신의 신체를 조작하는 활동을 통해 아이들은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를 키우고 놀이친구의 격려를 받고 격려를 하면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도 된다. 놀이는 즐거움을 주고 놀이는 아이들을 자유롭게 한다. 놀이는 아이들의 창조 욕구를 자극하며 놀이는 또한 아이의 상상력을 친구들과 함께 또는 혼자서 구현해 보는 경험을 갖게 한다.
아이는 빨간 배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빨간배를 타고 시냇물을 따라 흘러갑니다.
 
▲틈만 나면 놀아라. 틈을 내서 놀아라. 놀 틈을 만들자
 
 그런데 교실에 핸드폰이 하나 등장하면, 놀이는 사라진다. 아니 교실에 한 개의 놀이만 남게 된다. 그리고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서로 주고받는 쌍방향의 대화가 아니다. ‘왼쪽왼쪽! 오른쪽! 뒤에뒤에!’ 시키고 지시하는 한 방향의 말만 주로 뱉어진다. 아이들의 시선은 서로의 눈을 향해 있지 않는다. 자그마한 핸드폰 액정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다. 옆에서 친구가 넘어져도, 옆에서 친구가 이야기를 시켜도 좀체 고정된 시선을 움직이지 않는다.

 놀이를 하거나 다른 것을 하기에는 쉬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 아이들이 그 짧은 시간에 자신에게 최대한의 즐거움을 주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게임을 하는 것일 수 있다. 수업이 시작되면 버튼 몇 개만 누르면 간단히 중지할 수 있는 게임. 자신의 욕구를 최대한 그리고 빨리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아이는 핸드폰을 선택하는지도 모르겠다. 또 아이들이 몸을 움직여 놀 공간이 없어서 앉은 상태, 현재의 공간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핸드폰게임을 선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노는 행위에 대해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는 것은 성실하지 못 한 행동이며, 게으름뱅이나 무책임한 사람들이 하는 행동, 부도덕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심히 일하거나 공부하지 않고 노는 것은 실패한 인생을 사는 길이며, 인생을 허비하는 일이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왜 우리는 노는 행위에 죄의식을 가지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노는 것은 죄악이었을까? 역사 속에서 열심히 일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였을까를 생각해 보면, 고대에는 노예였고 중세에는 소작농이었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식민지 민중이었고, 노동자 등이었다. 이들이 일을 하지 않고 노는 것은 귀족에게, 영주에게, 제국주의자에게 자본가에게 손해를 가져온다. ‘일하라. 일하지 않고 노는 것은 죄악이다.’ 지배자들이 만들어낸 논리에 우리는 노는 행위에 부도덕, 바람하지 못한 행동이라는 부정의 옷을 입힌 것은 아닐까? 노는 행위와 화해를 시도해 볼만도 하다.

 학교가 변하고 있다. 놀 공간을 만들고, 시간표 편성을 융통성 있게 조절하면서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시간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놀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아이들은 학원 가느라 놀지 못 한다고 한다. 같이 놀 사람이 없어서, 부모님이 못 놀게 해서, 놀 곳이 없어서 등의 이유로 마음껏 놀지 못 한다고 이야기한다. 학원차를 기다리는 동안, 쉬는 시간 동안 아이들은 조그마한 틈이 나면 놀고 싶어 하고, 현재 주어진 조건 속에서 자신이 놀 수 있는 틈을 찾고 만들어내고 있다. 아이들에게 너에게 빠져나오기 힘든 미로와 같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아이들은 학원, 학원숙제, 공부, 잔소리 등이라 말한다. 학원 강사인 나는 이 말을 들으면 가슴이 뜨끔하고 미안함으로 마음이 불편해 진다. 아이들이 놀 틈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어른들도 자꾸자꾸 고민해야 할 것 같다.
하수정 <그림책 읽어주는 할머니가 꿈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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