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 살림집 안에 단칸 점방

 간판도 없고 이름도 없다. ‘점방’이란 보통명사가 이 마을에선 그곳을 가리키는 고유명사. 마을에 유일한 점방이다.

 ‘날 좀 보소’라는 호객은커녕 집 속에 가만히 숨어 있는 점방. 점방에 가려면 일단 대문을 들어선다. 지금 막 상추 쑥쑥 올라오는 텃밭이 있는 마당을 가로질러 토방에 닿는다. 수문장처럼 버티고 선 호랑이를 불시에 맞닥뜨린다. CCTV 따위는 필요없다는 듯, 금방이라도 포효할 듯한 호랑이 한 마리 모셔 놓은 액자 아래 방문이 바로 점방문. 쇠때가 채워져 있다면 주인은 아마 뽀짝 가까운 마을회관에 마실 가셨을 게다. 문이 열려 있다면, 주인은 안방에 계실 것이다. 안방에서 이 점방으로 향한 방문 아래쯤에 ‘사람 뵈라고’ 유리가 자그맣게 대져 있어 누가 오가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한옥 살림집의 방 한 칸에 들어선 점방이라니!

 물건을 사려면 토방에 신 벗고 마루에 올라서 방 문턱을 넘어 들어서야 하는 점방이다.
 주인장은 이 마을 구성리(해남 산이면)에서 가장 나이많은 박길님(95) 할매. 낭자머리를 한 할매가 지키고 있는 점방이다. 비현실적인 설정 같은 장면들이 이곳에선 암시랑토 않게 실재한다. 천연스런 일상이다.

 
 안방 옆이 점방, 50년 동안 문 열어와
 궁즉통(窮則通)이랄까, 대범한 발상이랄까. 안방 옆 대청을 점방으로 삼아 물건들을 진열해 놓았다.

 듬성듬성 밀도 낮은 배치가 이곳에 드나드는 손님들의 수와 매상을 짐작케 한다. 흐르는 세월 동안 마을 사람들도 줄어들고, 슈퍼며 마트며 편의점이며 새로운 이름을 지닌 유통공간들이 생겨났지만, 변화의 물살에 떠밀려가지 않고 고요하고도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켜오고 있는 단칸 점방. 기적적 생존이다.

 “영감이 시작한 때부터 시어 보문 한 오십 년 되얏어.”

 반세기의 역사를 지녔다. 한때는 ‘만물상회’ 비슷한 역할을 했을 것이되, 지금은 슈퍼타이 식용유 간장 화장지 홈키파 식초 소다 미원 술 담배 새우깡 등등 그저 한 집의 저장고라 해도 될 만큼 단촐한 품새다.

 “옛날에는 팽야 가정에서 쓰는 거는 다 있었제. 인자는 차가 가정에 있응께 다 나가서 사날르제. 때때로 댐배나 사러오까, 손님 벨로 없어.”

 하루하루 매출은 이 한마디로 정리된다.

 “으짜문 나가.”

 사탕 사먹으러 과자 사먹으러 아이들도 들랑날랑 수런수런하던 활기는 동네에 아이들도 많았던 세월 저편의 일. 그래도 여전히 동네 사람들에겐 ‘없으문 솔찬히 아수울’ 점방이다. 이웃에 살며 오명가명 들여다보는 김은호(57)·양인선(54) 부부 역시 이곳의 고객.

 “식용유든 화장지든 해필 똑 떨어졌을 때 ‘엄니∼’ 부름서 신속히 갖다 쓰는 곳”이다.

 이 점방에 흘러간 시간들을 그 옛날부터 급배속 화면으로 돌려본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문턱 닳게 드나들고,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청춘은 늙어지고, 누군가는 종내 안 뵈이고, 또 진열대의 물건들은 시절따라 얼마나 변해 왔을 것인가.


 할배가 도맡아 꾸리다가 세상을 뜬 후로 할매 혼자 이어온 세월만 헤아려도 근 20년.

 “울 아그들이 인자 귀찮한께 힘든께 하지 마라고 맨나 그래싸.”

 그때마다 할매의 대답은 “나 할 일”이라는 것.

 점방 건사를 당신의 소임으로 정해둔 할매는 여전히 기억력 총총하다. 마을 사람들 누구든 외상이라도 할라치면 외상장부에 적어두고 가지만, 할매 머릿속에 이미 훤하다. 할배 때부터 써온 주판알을 굳이 튕겨보지 않아도 계산 틀림없다.

 “우리 아들이 반장을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했는디 반에서 쓸 돈을 아그들한테 받아서 모태노문 내가 항시 말했어. 놈의 돈은 절대 손대문 못쓴다고.”

 ‘놈의 돈’ 앞에 엄중한 것은 점방을 하면서 할매가 지켜온 철칙.

 “천원 받아야 할 때 백원이라도 더 오문 얼릉 돌려줘. 우리는 팽생 놈의 돈을 무섭게 알고 중히 알고 살아. 내가 놈의 집 짝은방살이를 6년을 했어도 놈의 정제서 암도 없을 때 물도 한번 안 떠묵은 사람이여.”

 괜한 일에도 “여럽네”라는 말을 자주 올리는 할매지만, ‘놈의 돈’은 동전 하나도 ‘둘러묵은 적 없기때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여러움 없다.

 안방에 자리한 돈통은 나이를 많이 잡수었다. 창업동지이다. 손때어린 자국자국이 이 점방에 서린 역사를 증거한다. 돈통은 대체로 열린 채다.

 “괜찮애. 아무도 안 돌라가, 하하하.”
 방심(放心)은 때로 방심(芳心)이 되나니.
 낡았으나 새 돈통 마련할 필요는 없다.
 “인자 더 벌 일도 없응께.”
 할매는 안다. 자신의 운명과 이 점방의 운명이 같으리라는 것을.
 “이 동네 점방은 인자 이거 한나여. 두 개 있다가 한나 남았어.”
 
 이날팽상 아적마다 동백지름 볼라 머리 쪽지고
 ‘남들처럼’을 따르지 않고 ‘내 식대로’ 살아온 할매.
 “팽생 낭자머리여. 물도 안 딜애, 팽생.”
 이날 이때까지 파마머리는 딱 한 번 해봤다.

 “칠십 살 다 묵어서 한 번 했는디 영감님이 하지마라 그래. 싸납게 보인다고. 머리가 앙상(엉성)해. 빠마도 거천을 해야제, 맨나 일만 하고 산께 머리가 안 이삐던만. 이때끔 빠마는 다시 안해.”
 ‘비녀’라는, 일상에서 점차 사라져가는 물건이 할매의 머리 뒤에 늘 현재형으로 존재하고 있다.

 할매의 아침을 여는 의식은 머리를 매만지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낡은 달력을 펼친다. 도르르 말려 있던 달력종이가 펼쳐지면 그 안에서 참빗과 가지색 머리끈, 흰 면장갑 한 짝이 나온다.

 허리께 닿을 듯한 긴 머리. 가운데에 가리마를 타서 찹찹하게 빗어내려 한 갈래로 모은 다음 가지색 긴 끈으로 돌려 묶고 그 끈을 입에 질끈 물고 머리를 두 갈래 내어 새내끼 꼬듯이 한 가닥으로 땋은 다음 머리 뒤쪽으로 넘겨서 틀어 올리고 비녀를 찔러 꽂는다. 단순한 듯 장중한 동작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흰 면장갑 한 짝의 용도는 동백기름 바른 머리를 만지는 동안 손에 묻은 기름기를 닦아내는 것.

 “동백지름을 꼭 볼라야제. 안 보르문 엉성해. 동백지름은 제주 사는 우리 아들이 안 떨치고 사와.”

 동백기름병과 참빗 등등 달력 위에 올려진 고전적 아이템들은 할매의 손길 속에 여전히 현재형의 숨을 얻고 있다. 장갑을 끼고 손에 묻은 기름기를 부벼 닦아낸 다음 달력 종이를 다시 도르르 마는 것으로 아침의 의식이 끝난다.

 동백기름 바른 머리를 쪽지고 사는 할매는 일요일이면 늘 한복을 차려입는다.

 “교회 갈란께. 교회는 점잔한 자린께 한복 입어야제.”

 할매에게 의관정제란 어디까지나 한복을 갖추어 입는 것. ‘점잔한 자리’라면 어디든 당연히, 한복을 입어야 한다.

 교회에 가는 날 아침이면, ‘목간통에서 시치는 것’은 필수. 잔뜩 추운 날도 빠뜨리지 않는다. 정화수 떠올리고 비손할 때 할매들이 몸과 마음을 정히 했듯.

 장독대 앞이나 정제 부뚜막 조왕물그릇 앞 같은 일상의 공간을 성소(聖所)로 끌어올린 것은 그런 마음가짐이었을 터. 교회로 장소는 바뀌었어도 그 마음가짐은 한결같다.

 “내가 한복이 많애. 니 볼(네 벌)이여.”

 아들 넷, 딸 하나. 그 자식들을 ‘여울 때마다 지은 한복’을 잘 건사해서 이날 이때껏 입고 있다.

 “놈들이 그래, 내가 보지런한께 입는다고. 바지 입고 속치마 입고 보선 신고…. 한테다 벗어노문 수둑해. 놈들은 갰다 벗었다 안할라고 안 입는다던만. 근디 안 할라고 한께 귀찮제, 해버릇하문 괜찮해.”

 해버릇한 그 손길로 95세 할매는 마당 텃밭에도 여전히 ‘폿이며 콩이며 꽤며 옥조시며 고로고로’ 길러내고 집 구석구석도 말갛게 건사하고 있다.
 
 할배의 생전 모습 깃든 추억의 처소
 “꽃은 사그라졌어도, 이름은 놔둬야제.”
 ‘九旬(구순) 축하 김백원 김병윤’이라 쓰인 리본이 방벽에 붙어 있다.
 “집안 조카들이 구순 때 화환을 해 왔어.”

 기억은 사그라지지 말라고, 살뜰하게 매만지고 간직해 온 손길과 마음이 방 구석구석에 깃들었다.


 자식들의 결혼식, 손주들의 돌사진 등등 가족 대소사와 통과의례가 담긴 기념사진들이 박물관의 소중한 유물처럼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다. ‘어버이 은혜 감사합니다’라는 리본 달린 카네이션 꽃들도 그 아래 자리했다.

 그 벽에 간명하게 압축된 한 사람의 생애. 소박하고 장엄하다. 세대와 세대가 어떻게 흘러가고 이어지는지 증거한다.

 방바닥에 깔린 연분홍빛 이불엔 원앙이 쌍쌍으로 정답건만, 할배(김일택)는 가신 지 오래.
 “그때가 내 나이 칠십. 영감은 나하고 다섯 살 새여. 근께 칠십오에 가셨제.”
 자개장롱 속 이불더미 위엔 여전히 베개 둘이 나란히 놓여 있다.

 “영감 비개, 내 비개.”
 주인 잃은 베개를 고이 간직해 왔다.
 “보고잔께.”

 네 음절의 짧은 말이 하염없는 마음을 품는다.
 “그 시대에는 열여섯 일곱이면 시집간디 나는 스무 살 되드락 우리집서 살았어. 어매 아배가 우리 오빠를 몬자 여우고 나를 여울라고 안 여왔어. 우리 동무들 일곱이 다 시집을 갔는디 혼자 시집을 못가고 있응께 여럽더만. 우리 친정집이 뒤란에 감나무가 열일곱 그루가 조르라니 있어서 나는 ‘감나무집 큰애기’였는디, ‘감나무집 큰애기는 어째 시집을 안 간다냐’ 그 소리가 참말로 여러웠제.”

 머리가 치렁치렁하니 좋고 여간 이삐고 훤칠하다는 소리를 듣던 큰애기는 스무 살에 드디어 혼인을 했다. 신랑은 강진 군동면, 같은 고향 사람이었다.

 “시집와서 신랑 다리 보고 겁나 울었어. 발을 째까 다쳤다더니 애렸을 때 한쪽 발을 뒤진 것을 안 맞촤갖고 여영 못 걷게 되아분 것이여. 난중에는 나무다리 해갖고 댕겼어.”
 눈물은 시집온 그날 하루로 그쳤다.

 “이름쟁이가 내 이름이 좋다던만. 내 얼굴에 요 사마구가 나쁠 것 같애도 요것도 복사마구여. 우리 친정에서도 내가 복댕이라고 그랬어.”

 할매는 무어든 ‘내 복’으로 믿고 ‘내 복’으로 역전시키며 살아온 의지적 낙관론자.
 시집온 후 강진에서 살다가 목포를 거쳐 이곳 해남에 터잡고 주욱 살아왔다.

 “없이 산께 여그 와서도 놈의집 작은방살이를 6년 했어. 그래갖고 포도시 이 집을 사갖고 이때금 살아.”

 할배 몫까지 두 몫을 하고 살았다.
 “내 몸땡이로 농사 지서서 울 애기들 키왔제. 영감도 고생 많앴어. 내가 일을 할 적이문 저테서 앙거서라도 도와줄라고 한사코 애를 썼던 양반이제.”

 농사일을 하기가 어려웠던 할배는 살 도리를 찾아 점방을 열었다.
 “잘 못 걸어댕긴께 방에다 점방을 낼 생각을 했어. 첨부터 이 방에서 했어.”
 할매가 가끔씩 꺼내 보는 주판은 할배가 생전에 쓰던 손때 묻은 유품.

 “나는 주판을 우리 영감한테 배왔어. 좋게 갈쳐주제 생전 나한테 뭐이라고를 안해. 존 말로만 한팽생을 살다가셨제.”

 할매한테 점방은 할배의 생전 모습 깃든 추억의 처소이기도 하다. 이제는 동네 사람들 몇몇 간간이 들러서 술 한 병이나 담배 한 갑이나 식용유 한 병 사가는 고적한 점방.

 더 이상 대물림될 수 없을 것이되, 할매 할배의 한생애가 깃든 또 하나의 역사이다.
 “인자 쫌 있으문 이 동네도 없어진다고 하더만. 콜프장 들어선다고.”

 쉽게 허망하게 사라져가고 잃어가는 것들이 많은 세상. 아직 그곳엔 단칸 점방이 포도시 있다, 쪽진 머리 할매가 성성히 지키고 있다.
글=남인희·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
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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