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네, 건초더미. 존재의 다양한 심층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 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인간이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 경계 짓기
 
 태초에 말씀이 있어 아담과 이브를 만들고, 말씀인 신은 아담에게 지상과 지하에 태동한 자연물 각각들에 이름을 지어줄 것을 명하였다. 아담은 작고 둥글며 긴 귀를 쫑긋이는 존재에게 토끼라는 이름을, 벌릴 때마다 날카로운 이빨과 콧등에 여러 겹 주름이 잡히는 덩치 큰 존재에게 사자라는 이름을, 그렇게 나 아닌 존재들을 부를 적절한 이름을 주었다. 이름을 붙이자 아담은 이브와 함께 그 동물을 보러가지 않고도 동물에 대해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었으며 어느 날은 이브를 보고 “당신의 잠든 모습은 한 마리 토끼 같고 당신이 저만치서 내게 사과나무 아래로 어서 오지 않고 무엇 하냐고 소리를 지를 때에는, 마치 이브가 아닌 암사자 같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름 짓기는 이해와 소통을 위한 시간과 노력을 덜어주었으며, 더불어 은유라는 미묘한 암시를 통해 상대를 추겨 세우거나 노골적이지는 않게 상대방을 슬쩍 비꼬는 매우 효과적인 장치라는 걸 아담은 곧 깨달았다.

 그러나 이 최초의 ‘이름 짓기’라는 행위가 가진 본질적인 의미는 다른 데 있다. 이름을 짓는다는 건 사물 혹은 유기체 각각의 특성을 비교하고 구분해 이렇게 저렇게 묶고 분류하는 정신의 활동, 이른바 경계 짓기다. 그것은 사물 자체를 만나고 경험하는 행위가 아닌, 그들을 문자 안에 잡아넣어 일종의 지도를 만드는 일. 아담의 지도 만들기가 끝나자 사물은 그의 정의에 의해 이것 혹은 저것이라 불리었고 하나의 명명(命名) 뒤에 의례 붙기 마련인 또 다른 기준들이 생겨났다. 가령, 토끼는 귀엽다, 연약하다, 소심하거나 의심이 많다는 규정들이 그런 것들이었다. 이 기준들이 토끼라는 유기체를 얽어맸고 종속했으며 토끼는 존재 전체, 전일성(全一性)이 아닌 아담의 의식이 포착한 협소한 의미로만 이해되는, 이상하고도 경이로운 사태가 발생한다.

 저것은 하늘이다. 이것은 땅이다. 당신은 여자이고 나는 남자다. 유기체들에 선을 긋고 경계를 설정하는 일은, 공간과 시간에도 그리고 보이지 않는 신념이나 감정들에도 일어났다. 시간은 현재를 기점으로 과거와 미래로 나뉘었으며, 공간은 위와 아래로 양분되었다. 아담을 만족시키는 것들, 그에게 쾌락을 제공하는 포근하고 따사로운 햇살과 달콤한 과실은 선(善)이 되었고, 시야를 가려 뜻밖의 좌절을 안기는 컴컴한 밤과 몸에 소름이 돋게 하는 차가운 냉기들은 악(惡)이 되었다. 삶은 선이, 죽음은 악이 되었다.

 더 나쁜 건 곧이어, 조금 나중에 왔다. 아담은 어느 날 문득 궁금해졌는데 ‘그것을 왜 신께서 금지했는가. 모든 것이 내게 허락되었는데 왜 동산 가운데의 선악과만 취해서는 안 되는가.’ 의문은 실천을 낳는다. 금기의 원인과 결과를 알려면 금기를 직접 넘어서보는 방법뿐이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서 입에 넣었을 때 그 맛은 달콤했을까. 그동안의 모든 경험들을 능가하며 보상하고도 남는 최고의 환락이었을까. 아담과 이브가 그 후에 만들어낸 이야기는 선악과가 얼마나 아찔한 쾌락을 제공했는지를 추리하게 한다. 아담이 뱀이라는 사탄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를 꼬였다라고, 내가 신이 금지한 과일을 먹은 건 본래의 내가 아닌 유혹을 물리칠 수 없는 아주 강한 것이 나를 덮쳤기 때문이라고. 사실, 아담이 만들어낸 변명 혹은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뱀은 아담이 발견한 자기 안의 다른 무엇, 또 다른 변용된 의식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아담이 자기안의 다른 자아를 타자화해 뱀이라는 형상으로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렇게 아담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자아의 일면인 ‘호기심’과 ‘충동’들은 뱀이라는 타자가 되었고, 그 후로 수천수만의 시간이 흘렀건만 아직도 우리는 나 아닌 바깥에서, 그리고 도처에서 사악한 악들을, 곧이라도 나를 집어삼키려하는 사납고 불안정한 타자들을 발견한다. 모든 것은 ‘이름 짓기’ 라는 꼬리표 붙이기에서 비롯되었다.
 
▲경계는 대립과 동시에 연결이고 만남이다
 
 시인 함민복은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썼다. 어느 대로변 혹은 주택 단지가 죽 늘어선 골목을 걷다가 시인은 담장위에 국화 화분을 올려둔 어느 집을 발견한다. 담장은 내 것과 내 것 아닌 것의 경계를 알리는 깃발. 이 선을 넘으면 `당신은 필경 도둑이오!’를 알리는 완강한 주의경보. 집 주인이 왜 화분을 담장위에 늘어놓았는지 생각하다가, 불시의 침입자가 담장을 넘을 때 혹 화분을 넘어뜨려 낼 소리를 듣기 위함인가에 생각이 미치던 찰나, 불현듯 밀려온 국화꽃 향기. 향기는 경계를 모르고, 꽃은 내 것과 내 것을 알지 못하기에 담장의 이쪽과 저쪽 위와 아래로 향기는 퍼진다.

 그리고 순간, 담장으로 상징되던 대립은 무너지고 담장은 집의 안과 밖이 만나 향기를 흠향하는 건배의 지점, 밖과 안을 잇는 연결고리였음이 드러난다. 파도가 파도일 수 있는 건 파도의 골과 마루가 있기 때문이다. 골만 있거나 마루만 있는 파도는 존재할 수 없다. 골과 마루가 만나야 파도라는 현상이 이루어진다. 삶 또한 질곡이 있기에 삶이다. 고통만이 존재하거나 순수하게 기쁨만 존재하는 ‘행복한 왕자’식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삶이라는 주머니에서 기쁨만 취하려한다면 언젠가 고통이 왔을 때 “이게 뭐야” 진저리치며 삶 자체를 증오하게 되고, 그러면 어느새 나는 삶이라는 주머니 자체를 거부하게 되리니. 기쁨만이 있다면 어떻게 그것이 기쁨임을 알까. 별이 보이는 것은 어둠이 배경이기 때문, 우리는 어둠이라는 배경과 별을 동시에 보아야만 거기 별이 있음을 안다. 대립들 간의 차이점이 아무리 뚜렷하더라도 그 대립들은 어느 한쪽도 다른 쪽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대립은 필경 상호의존적이다. 삶이란, 존재란 그런 것이다.
모네, 루앙성당 오후. 해질녁. 아침.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내 몸의 피부를 통해 나인 존재와 나 아닌 존재를 구분하므로 피부는 내가 나와 나 아닌 것을 가르는 최초의 경계이다. 그러나 몸 안으로 들어와 보면 어떤가. 나는 내 몸이 곧 나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내 몸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내 몸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 더 맞는 문장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내 안에는 내가 나임을 의식하는 `자아’라고 불리는 측면이 있다. 나의 ‘자아’는 욕구와 욕망을 지니고 때로는 피하고 때로는 도전하며 자신에 대해 자랑스러움이나 수치를 느낀다. 자아는 감정을 지녀서 어느 때는 기뻐하고 후회나 실망을 한다. 자아는 제 삶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고 있기에,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을 때는 분노하고 몸이 기능을 다할 때는 몸을 잊는다. 이렇게 나는 몸 안에서 더 `나답다’고 느끼는 일면을 분리하여 `자아’ 라는 이름을 붙이고 몸과 의식(자아)을 분리한 후 마음에 드는 나의 어떤 측면은 인정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측면은 부정하면서 자아의 저편으로, 자아 너머로 보내버린다. 내가 의식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나의 일부, 그것이 바로 나의 ‘그림자’이다.
 
 아직도 마음이 불편한 날은 시험 보는 꿈을 꾼다, 영어로 된 수학문제를 푸는 꿈. 오래전에 학교를 졸업했고 그러니 다시 시험을 볼 리는 없다고 부정해도 꿈속의 현실은 식은땀을 흘리는 열등한 학생이다. 여전히 생은 알지 못할 것들 투성이고 잘 내딛고 있다고 생각하며 내민 발자국이 헛발질인 경우도 잦아서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밤이면 세상이 내준 문제를 못 풀어 쩔쩔매는 꿈을 꾸는 것이다. 혹은 아마도 그런 날의 낮의 나란 필시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며 오만방자했거나, 해결해야할 문제의 핵심을 보지 못하고 ‘이 정도면 최선이다’라고 자위했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한 날 찾아오는 꿈은 자아보다 더 큰 어떤 내가 나에게 보여주는 그림자, 내가 부정하려한 나의 모습. 그래서 더 조심스럽기를 요구하는 어떤 메시지. 꿈은 내가 경계를 나누어버린 자아와 무의식을 다시 하나로 연결하고, 때때로 앓게 되는 병은 내게 몸과 정신의 균형을 회복할 것을 권유한다. 몸과 의식, 나와 타자, 나의 슬픔과 기쁨 그들은 애초에 둘이 아닌 하나였기에. 그런데 내가 자신이길 바라는 것과 아니길 바라는 것에 경계선을 긋고 ‘나는 이것이지 저것은 아니다.’라고 느끼게 되었던 것이기에.
 
 미국의 선구적인 심리학자였던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가 이성적 의식이라고 부르는 일상의 의식은 의식의 한 가지 특수한 형태에 불과하다. 이 일상적 의식의 주변에는 아주 얇은 스크린으로 격리되어 있는, 전연 다른 의식상태가 잠재해 있다.”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우리의 일상적인 각성이란 마치 지도에도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대한 의식의 대양에 둘러싸여 있는 하나의 하찮은 작은 섬과 같다. 언젠가 자발적으로, 광대한 미개척의 진정한 영역, 즉 의식의 신세계에 대한 지식이 우리의 격리된 섬 같은 협소한 각성을 범람시킬 때까지, 이 일상적 각성을 격리하는 산호초 위로 대양의 파도가 세차게 몰아치고 있다.
- 무경계(무우수)
켄 윌버 ‘무경계’
 
▲지식을 늘었으나, 성장은?
 
 ‘무경계’는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기 위한 입문서이자, 마음의 심층부터-깨달은 자라 불린 구루 혹은 선사들이 도달했던-우주와의 합일 혹은 자아초월의 경지까지 인간 의식의 스펙트럼을 안내하는 심리학서이다. 켄 윌버는 자기 지식을 향상시키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심리학 체계와 종교 체계를 접할 때 느끼는 어리둥절함을 재미있게 풀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가령 선불교에선 자아를 잊으라거나 초월하라고, 혹은 자아의 정체를 꿰뚫어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에선 자아를 강화하고, 단단히 하고, 확립시키라고 말한다. 어느 쪽이 옳은 것일까? 켄 윌버는 이들 다양한 접근법이 서로 갈등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스펙트럼의 다양한 수준에 있는 실질적인 차이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신분석은 내가 의식에서 몰아낸 부분인 ‘그림자’와 내가 인정하는 사회적 자아인 ‘페르소나’를 재통합시켜 강하고 건전한 자아, 받아들일만한 자기상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페르소나만으로 살고 있는 사람에게 자신을 긋고 있는 경계를 재작도하도록 돕는 것이다.

 반면에 선불교의 가르침은 생명체와 환경 간의 분리를 치유해 우주와의 전체성을 회복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이른바 합일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아프리카의 부시족들이 밤이면 언덕에 올라가 듣곤 하던 별들의 장엄한 노랫소리는 과장이나 상상된 우화가 아니었다.

 나는 성장했을까? 사회생활은 내게 분별력과 조심성을 가르쳤고, 지식은 늘었으나 성장은 아니었다. 성장은 자기 자신의 좀 더 깊은 수준을 인식하고 포괄해가는 과정, 경계를 지우며 정신의 지평을 넓혀가는 일이다. <무경계>를 시간의 격차를 길게 두고 세 번째 읽고 있으나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과 가슴으로 오는 ‘앎’은 철저하게 다른 종류라서 여전히 나는 제자리걸음이다. 그러나 제자리걸음이라도 눈에 띄지 않는 미세한 차이로 근육은 단단해지고 발걸음은 확고해질 것을 안다. 영원은 언제나 ‘이미 지금(always already now)’이므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는, 현재만이 유일한 실재이므로.
 
 당신의 존재조건은 거의 바위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수천 년에 걸쳐 남자들은 분투했고 괴로워하고 가족을 부양해왔으며, 여자들은 산고를 겪으며 아이를 낳았다. 백 년 전에는 아마도 다른 남자가 바로 이 지점에 앉아 당신과 마찬가지로 빙하 위로 스러져가는 빛을 경외심과 동경을 갖고 바라보았을 것이다. 당신처럼 그도 남자에 의해 잉태되었고 여자로부터 태어났다. 그가 느낀 고통과 순간의 기쁨도 당신의 느낌과 똑같을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이었을까? 그가 바로 당신 자신이 아니었을까? - 무경계
박혜진<문예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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