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신의 와인은 휘프노스의 잠을 부른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과 신념을 사랑하는 것의 차이

▲ 감각은 마법이다. 감각은 인식의 기초를 제공하지만 또한 감각은 진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로서의 신념은 진리라고 여겨지지만 맹신과 맹목과 맹종의 함정에 빠지면 눈을 잃는다. - 르네 마그리트, ‘연인’
 하루 두 차례, 정오와 일곱시에 슈츠가 양탄자를 들어올리고 사각형의 나무를 빼내면, 그의 아내는 맛있는 요리와 좋은 포도주 한 병을 들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슈츠는 매일 저녁 그곳에 와서 친구이자 고용주인 그와 더불어 인간의 권리, 관용, 영혼의 영속성, 독서와 교육의 미덕 같은 고상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럴 때면 고결하고 관대한 그런 견해들로 인해 그 작은 지하실이 환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칼은 처음에는 신문들도 내려보내게 했고 라디오도 곁에 두었다. 하지만 육 개월 후 뉴스가 점점 더그를 실망시키고 세상이 진짜 타락하는 것처럼 여겨지자, 인간의 본성 속에 간직되어 있다고 굳게 믿고 잇는 신념을 일시적인 정황의 반향으로 위협당하지 않기 위해 라디오를 치우게 했다. 팔짱을 끼고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그는 지하실 구석에서 장래가 불투명한 현실과의 모든 접촉을 거부하고 자신의 신념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결국 그는 지나치게 사기를 꺾어놓는다는 이유로 신문을 읽는 것마저 거부하고, 서재에 꽂힌 걸작들을 되풀이해 읽으면서, 영속하는 것이 일시적인 것에게 가하는 그런 반박들에서 자신의 신념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힘을 길어내게 되었다.
 신선한 공기를 쐬지 못하고 전등불 아래에서 사는 생활로 인해 칼은 더욱 뚱뚱해졌고, 몇 년이 자니자 그의 뺨에서는 분홍빛 혈색을 찾아 볼수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낙관론과 인간성에 대한 믿음은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세상에서 관용과 정의가 승리하기를 기다리며, 그는 지하실 속에서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다. 친구 슈츠가 전해준 바깥 세상의 소식이 아무리 끔찍해도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 로맹 가리, ‘어떤 휴머니스트’ 中
 
▲맹신(盲信)의 와인은 휘프노스의 잠을 부르고

 독실(篤實)한 휴머니스트가 있었다. 유대계 독일인 칼 뢰비는 유능한 사업가이기도 했지만 인문학적 지성을 갖춘 교양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낙관주의자였으며 인간의 품성이 지극히 선(善)하다는 굳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휴머니스트로서의 그의 면모는 나무랄 데 없는 기품이 있었다. 평소에 깊은 우정을 나누는 벗들과 함께 질좋은 시가와 맛좋은 와인을 즐기며 인류가 만든 위대한 고전을 안주삼아 그의 서재를 인문학의 향연이 폭발하는 아카데메이아로 만들곤 했다. 그의 집사이자 하인이기도 한 슈츠에게도 신분의 차이를 두지 않고 격의없이 시가와 와인을 나누며 담론을 펼치는, 그야말로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다.

 신실(信實)한 휴머니스트 칼 뢰비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독일의 권력을 히틀러가 장악하자 나찌의 광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유대인 친구들은 히틀러와 나찌의 아리안 인종주의의 두려워하여 이민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우리의 휴머니스트 칼은 ‘사람좋은’ 웃음을 지으며 벗들의 간청을 완곡하게 사양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선량한 인간은 그 근본이 선하기 때문에 절대 극단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다수의 선한 인간들이 이를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진실(眞實)한 휴머니스트의 낙관은 애석하게도 빗나가고 말았다. 히틀러의 폭압적 통치는 유대인 칼의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를 도와줄 친구들은 이미 해외로 망명을 해버렸기 때문에 칼에게는 탈출구가 없었다.고심 끝에 내린 칼의 묘책이 있었으니, 은밀한 지하실을 만들어 거기에 은거하며 히틀러가 몰락하기까지의 시절을 견디는 것이었다. 그의 충실한 하인이자 좋은 벗인 슈츠 부부가 그의 안위를 돌보는 것에 충실하게 언약했고, 집과 공장을 포함한 모든 재산도 슈츠의 명의로 이전하여 나찌의 약탈로부터도 피할 방도를 마련해 두었다. 선량한 슈츠는 나중에 생길지 모르는 언짢은 일을 완전히 봉쇄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재산의 ‘일시적’ 이전을 증명하는 문서까지 작성함으로써 우정을 과시했다.

 칼의 아름답고 숭고한 신념은 어떻게 되었을까? 기어코 히틀러와 나찌는 2차대전을 일으켰고 인간의 생명과 인류의 문명을 파괴하는 무도(無道)한 길을 걸었다. 하지만 휴머니스트 칼은 여전히 시가와 와인을 즐기며 인간의 궁극적 선(善)을 신뢰했고, 비록 지하실로 옮겨지긴 했으나 슈츠와 함께 장서(藏書)를 읽으며 인본주의(humanism)와 낙관주의(optmism)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히틀러가 죽고 나찌도 패망했다. 휴머니스트 칼 뢰비의 신념이 실현되었을까?
 
 등장인물
 선임 (총을 가진 저격수 / 60대 후반, 극이 진행되면서 점점 늙어간다)
 후임 (고배율 망원경을 가진 저격수 / 20대 중반)
 
 장소는 고층 건물 옥상.
 얇은 국방색 담요가 바닥에 깔려 있고, 그 위에 저격용 총과 무전기가 놓여 있다.
 저격수 ‘선임’은 총에 달린 조준경으로 목표물을 노려보며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요량으로 대기하고 있고, 저격수 ‘후임’은 피곤한 듯 두 팔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엎드려 있다. 저격수 ‘후임’ 앞에는 저격용 총 대신 고배율 망원경이 놓여 있다.
 
 후임 : (망원경 초점을 맞추며) 테러범이라고 지휘관이 그랬죠?
 선임 : 그랬겠지.
 후임 : 직접 듣지 않았어요?
 선임 : 그게 뭐가 중요해? 직접 들었어. 됐지?
 후임 : 테러범 조직이 어딘데요?
 선임 : 몰라.
 후임 : 왜 몰라요?
 선임 : 나라고 다 알아!?
 후임 : 선임이면 알아야죠. 지시사항을 들어도 얘기도 안 해주면서.
 선임 : 대기한 채 상황보고. 그게끝이야.
 후임 : (망원경의 위치를 바꾸며 다양한 방법으로 보려고 하지만 어렵다) 테러범이라면 지시 내린 조직이 있을 거예요. 어디죠?
 선임 : 오래 돼서 기억 안나. 망원경 제자리로 복귀해.
 후임 : 중요하니 기억 좀 해봐요. 하마스? 알카에다? 헤즈볼라, 탈레반? 어디죠?
 선임 : 모른다니까! 우린 명령이 떨어지면 방아쇠만 당기면 돼. 저 놈 소속, 피부가 검거나, 희거나, 중간이든 상관없어. 우린 저격하라는 놈만 쏘면 나머진 알아서 움직이는데 그게 어려워!?
 후임 : 쏘더라도 누군지는 알고 쏴야죠!
 - 김원태, ‘오늘의 저격수는 딸기맛 초코바를 먹는다’ 中
세계는 빛의 제국이다. 어둠의 세계만을 응시하고 있으면 빛의 세계를 인식하지 못한다. 신념은 어둠의 세계를 고집하는 눈이 되기도 한다. 그 신념은 세계를 어둠이라고만 정의한다. -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맹목(盲目)의 과즙은 타나토스의 죽음을 부르고
 
 도시의 고층 건물 옥상 위에 두 사나이가 있다. 두 사람은 군인으로서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다. 후임은 고배율 망원경을 가지고 시종일관 감시만 하는 젊은 관측병이고, 선임은 장총을 가지고 초지일관 명령만 기다리는 저격수다.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테러범을 막는 것이 두 사나이가 맡은 특수 임무이지만 오랜 세월 이들은 단 한 명의 테러범도 발견하지 목했고 발견할 수 없었으니 당연하게도 단 한 방의 총알도 발사할 수 없었다.

 호기심 많은 후임과 복종심 강한 선임의 일상은 늘 티격태격 말다툼이 잦다. 의문을 참지 못하는 후임은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명령에 복종하는 선임은 절대 질문하지 않는다. 어느날 두 사람은 평소처럼 아웅다웅 시비를 붙다가 총기 오발사고를 내고, 그 책임으로 선임 저격수는 강등되어 관측병이 되고 후임 저격수가 상관이 된다.
 
 선임 : 제 강등 사유가 뭐죠?
 후임 : 지휘관님의 특별한 뜻이 있겠지.
 선임 : 뭐든 말씀해 주세요.
 후임 : 그러니까 그 뭐든이, 뭐냐고? 그새 까먹었지? 그럴 줄 알았어. 집단 기억상실이 유행이라 하던데, 자네도 그 병에 걸린 거 아니야? 왜 내가 선임이 됐는지 그게 궁금했었잖아.
 선임 : 아! 예.
 후임 : 나도 몰라서 묻는 건데, 내가 어떤 사람 같아? 괜찮아. 생각나는 대로 말해봐.
 선임 : 매사에 부정적이며, 의심이 많고, 즉흥적이며, 명령에 불복종하고.
 후임 : 그 말을 뒤집어 보면, 부정적으로 생각하기에 그나마 위험을 빨리 감지하고, 의심이 많아 잘 속지 않고, 즉흥적이니 빠르게 대처할 수 있어. 명령 불복종? 부당한 명령을 미쳤다고 복종해?
 선임 : 제가 왜 강등됐습니까?
 후임 : 몰라.
 선임 : 모르면 만들어 주세요.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후임 : 자네는 믿고 싶은 것만 믿으니까.
 선임 : 명령만 믿습니다.
 - 김원태, ‘오늘의 저격수는 딸기맛 초코바를 먹는다’ 中
 
 복종은 흔히 굴복이 되고 자주 굴종이 된다. 명령과 복종 사이에 ‘절대’라는 불가역적이고 거부할 수 없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음흉한 자들의 음모가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복종이 가치를 발휘하고 의미를 가지려면 그 복종의 내용과 대상이 다분히 공익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 맹목적인 복종은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없게 만들고 악의 편을 이롭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저격수는 그에게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이 악의 편에 서 있지는 않은지, 저격의 대상이 선량한 사람은 아닌지, 그의 저격이 다른 희생자를 낼 가능성은 없는지를 따져야 한다. 이러한 성찰이 없는 신념의 복종은 테러범을 보호하고 선량한 시민을 저격하는 우를 범하기 마련이다.
성(成)은 안전하다. 아니, 성은 안전하다고 믿는 신념 때문에 안전한 것인지도 모른다. 눈이 성에 갇히면 맹(盲)이 된다. 성 밖의 눈은 맹목의 신념에서 자유롭기에 진실을 볼 수 있다. - 르네 마그리트, ‘피레네 산맥의 성채’
 
▲맹종(盲從)의 복음은 마에나스의 광기를 부르고
 
 “마스칼리코! 마스칼리코 녀석들이다!”
 자코베가 울부짖듯 외쳤다. 굉장한 부르짖음이 이에 호응했다. 군중들 가운데에는 애초부터 이런 폭발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마스칼리코로 쳐들어갈 것을 제안했고 그 말이 순식간에 퍼져나간 것이다.
 낫과 도끼, 곡괭이, 구식 장총 등으로 무장한 대부대가 광장에 다시 집결했다. 교회 앞에 이르러 이 우상 숭배자들은 소리높여 외쳤다.
 “성 판타레오네!”
 한떼의 광신자들이 성 판타레오네 성체 둘레로 모여들었다. 성 곤셀보에 대한 지독한 욕설을 늘어놓으면서 낫을 흔들고 기세를 올렸다.
 사방에서 마스칼리코 사람들이 방어하기 위해서 밀려나왔다. 혼혈아들처럼 얼굴이 황갈색으로 상기된, 피에 굶주린 이들은 기다란 칼로 무장을 하고 상대편의 배나 목을 찔렀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피투성이가 된 네 명의 장사 등에 얹혀진 은으로 만든 성체는 혼전의 한가운데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무감동하게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네 명의 장사들은 기진맥진하였건만 도무지 이 성체를 그들의 어깨로부터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 가브리엘 다눈치오, ‘우상 숭배자들’ 中
 
 신념은 이데올로기를 동반한다. 절실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강한 믿음과 의지가 필수적인데, 체계적으로 이론화된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신념을 굳건히 하는 데에 아주 효과적이다. 국가의 안녕과 질서의 수호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도,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 이데올로기도, 인본과 인간애를 표방하는 휴머니즘도 사람들에게 강력한 신념을 갖게 한다. 이 신념의 공과는 매우 극단적이어서 신념을 가진 자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맹신과 맹목과 맹종의 우를 범하지 않을 때에라야 파멸을 피할 수 있다.
 
▲눈 먼(亡 + 目) 신념의 종막은 맹자(盲者)
 
 슈츠는 안채로 아내와 함께 이주했다. 그에게는 칼이 외국으로 도피했고, 그 사업체를 합법적으로 양도받았음을 증명하는 서류가 있었다.
 신선한 공기를 쐬지 못하고 전등불 아래에서 사는 생활로 인해 칼은 더욱 뚱뚱해졌고, 몇 년이 자니자 그의 뺨에서는 분홍빛 혈색을 찾아 볼수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낙관론과 인간성에 대한 믿음은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세상에서 관용과 정의가 승리하기를 기다리며, 그는 지하실 속에서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다. 친구 슈츠가 전해준 바깥 세상의 소식이 아무리 끔찍해도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몰락하고 몇 년 후, 이민을 갔다고 돌아온 칼의 친구 하나가 실러 가에 있는 개인 저택의 문을 노크했다. 학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반백의 슈츠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의 손에는 괴테의 작품이 들려 있었다.
 “아뇨, 뢰비씨는 이제 여기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분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모두 조사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 로맹 가리, ‘어떤 휴머니스트’ 中
 
 자기들의 우상과 신앙만을 맹종하던 우상 숭배자들은 자기들의 목숨도 자기들의 우상도 지키지 못하고 전멸해버렸다. 사회적 책무와 공적 가치보다 맹목적 충성에 도취된 저격수는 누구를 위하여 총을 쏘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 인간의 본성과 욕망의 여러 측면을 보지 못하고 선함만을 맹신했던 휴머니스트는 건강도 우정도 모두 잃고 말았다. 눈멀지 않았다고 다 눈뜬 것은 아니다. 맹신의 와인에 취해도, 맹목의 과즙에 쩔어도, 맹종의 복음에 빠져도 눈먼 맹인이요 눈먼 맹자다. 눈먼 신념은 그래서 위험하고 또 위험한 것이다.
김시인 <인문학공간 소피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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