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임 부사 칠곡 집 찾아가 담 쌓아준 담양사람들

▲ 대숲과 담장.
 계속 길 위의 날들이다. 이번에도 대구에 닿았다. 대구 북구는 금호강변을 사이에 두고 칠곡군과 연접한 지역이다. 80년대 대구시가 확장하며 칠곡의 한쪽을 북구에 편입했다. 그런 금호강에서 금호강 바람 소리 길 축제를 대구 북구가 지난 늦여름에 펼쳤다. 나는 그 축제에 참관해서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다.

 옛적 금호강은 거의 썩은 물이나 진배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섬유공장에서 나오는 각종의 염료들이 이 강에 넘실대었다. 시대가 흘러가며 더 이상은 그런 일이 없어야 된다는 환경에 대한 각성이 이뤄지며 오폐수는 사라져가고 정화되어 갔다. 지금은 낚시꾼들이 강변에 있고, 둔치는 서서히 회복해가고 있으며, 하중도는 그야말로 야생의 상태로 복원되어 있다.

 얼마 전에 우리지역에서 회복시킨 수달을 이 지역으로 방사하기도 했다는 소식도 접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강은 정말 좋아졌다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2일간의 축제에는 5만여명이 모여들었고, 대부분은 인접지역 분들이 굿 보러, 쉬러, 즐기러 오신 경우였다. 동네의 잔치를 더욱 확장하여 관광객을 유입하는 축제로 승화하고자 하는 것이 이즘의 축제다. 대구 북구도 이런 부분에 대해 무언가 도약의 전기로 삼고 싶어한 탓에 나 또한 거들어 주러 간 것이다.

 그렇게 집단의 회의가 끝나니 오후 4시쯤이 되었다. 그냥 담양으로 돌아가기에는 아쉬운 시간이다. 지난 번 태백을 찾을 때 놓치고 갔던 담양담의 생각이 확 일어난다. 그래 담양의 우리 조상들이 이곳 칠곡까지 험한 고갯마루를 넘어와서 쌓았다는 담을 보고가자라고 결심했다. 대구의 벗은 고향이 칠곡인지라 벗에게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물으니 지천면의 신리로 가라고 한다. 경수당이라는 곳이 바로 거기이니 잘 찾아가라고 좌표를 찍어준다. 북구의 문화예술회관에서는 14㎞ 정도의 거리다. 그닥 멀지 않으나 초겨울의 해는 여우꼬리만치도 안남은 듯하다. 그다지 큰 산이 없는데도 마음이 조급해진다.
 
▲왜관·구상 시인, 그리고 경수당
 
 차를 달리며 칠곡을 생각해 본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왜관이다. 지금처럼 일본과의 관계가 경색해졌지만 옛적에는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우리의 문물을 그들에게 전파하고 생사의 여탈도 일정 부분 관여했던 적이 있었음을 상기해 본다. 통신사의 행렬과 왜관이 그 역사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왜관은 또 치열했던 6·25 동란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지금 그 흔적은 왜관철교에 고스란히 남아있기도 하다.

 그리고 떠오르는 구상 시인이 있었다. 비련의 화가 이중섭의 벗이었고, 박정희와도 막역하였던, 그러나 사회의 부조리 앞에서는 당당하게 그릇됨을 외쳤던 분이 구상 시인이다. 그분의 문학관이 또 칠곡에 있다.

 이런 칠곡은 또한 가톨릭의 성지이기도하다. 가실교회라 불리는 성당과 성베네딕도수도원이 있으며, 한티성지라는 순교자들의 무덤과 피정지가 있기도 하다. 본디 골짜기가 크게 일곱 개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숫자 칠을 옻칠할 때 칠로 바꾸어 불렀다고 전해지는 이 지명은 우리 강산이 그러듯이 역사로부터 한 번도 자유로워진 적 없이 격랑을 겪어왔던 지역이기도하다.

 이런 저런 생각 속에 목적지의 인근에 당도했다. 한데 급히 눈에 들어오는 이정표에 창평1리 라는 지명이 보인다. 공자의 고향이라는 창평이 심지어 전라도 담양의 땅이름과 같은 창평이 들어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고을이 본래 유학을 숭상하던 마을임을 지명으로 답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혼자 생각하고 경수당을 찾는다. 헤매고 헤매는 그 중간에는 마을을 가로지르는 기찻길이 있다. 마을이 철로로 분절되어 버렸다.

 겨우 주소지를 찾아 경수당에 도착했다. 해는 저물어지고 밥 짓는 연기가 모락거린다. 집 앞에 논이 자리하고 논으로부터 불과 일 미터도 안 되는 지반위에 대지가 자리했다. 집 높이의 절반 정도를 가리는 담이 눈에 확 들어온다. 뜨락과 집의 경계에 담이 있다. 저 담이 대저 담양사람들이 쌓았을까 라고 여기며 가까이 다가간다. 여염집의 담 보다는 대가집의 담답게 정성이 깃들어져 있다.
 
▲“담양담 보러 담양서 왔어요”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돌을 막돌이라고 하는데 이 돌을 모으고 모아서 황토흙에 버무려서 층을 지으며 쌓았다. 막돌바른층 쌓기라고 배운 것이 생각난다. 바짝 정신을 차리고 담의 둘레를 둘러보다 대문간에 이르렀다. 정문은 열쇠로 채워져 있는데 곁문은 출입의 흔적이 있다. 누군가 살고 있다는 증거인데, 불쑥 중년의 여성분이 나오신다. 목례를 하고 ‘구경 왔습니다’라고 하니 ‘둘러보세요’라고 응답해주신다. ‘네’ 그리하면서 얼굴이 마주치니 “근데 담양담을 보고 싶어서요” 이렇게 말씀드리니 “많이 보수하고 이제는 뒤쪽밖에 없어요. 안으로 들어가셔서 보세요”라고 자상하게 일러주신다.

 안하는 것 보다 낳은 말씀을 던져드렸다. “담양담 보러 담양서 왔어요.” 깜짝 놀라시며 더 반가워해주신다. 해 어스럼제에 손님은 사실 꺼리는 법인데 그냥 흔쾌히 받아주심이 감사할 따름이다.

 동쪽의 담벼락을 따라가니 마치 소쇄원의 오곡문 담장을 보는 듯하다. 사면을 타고 상승하는 산자락에 담을 놓기 위해 층계를 두어 완급을 조율하고 한편으로는 안정화된 시선을 확보해주었다. 그대로 곧추 쌓았다면 필시 이는 성곽일 터이다. 하지만 집과 집, 집과 자연 사이의 경계이면서 성과 속, 자연과 인공의 연접 지점에 배치한 이 담장은 크게 기교를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의지의 발아지점 같아 보여 안도했다.

 그리고 언덕을 차올라 뒤편의 밭과 닿은 지점에 담장은 타원형을 그리며 외부와 내부 사이를 구분 짓긴 했지만 그곳 언덕에 서면 내부의 모든 건물들이 한눈에 다 보일 것 같은 모양새였다.
담장.

 저 담은 소쇄원의 애양단의 담장 같이 굳이 쌓지 않아도 되면서도 쌓음으로서 언덕을 차고 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기능 정도가 아닐까 상상하다 그 길다람에 신안의 우실을 떠올렸다.

 뒤란을 돌아본다. 연통도 소쇄원 제월당과 흡사하고 화계도 조성되어 있다. 장독대의 규모로 보아 참 많은 식솔들이 있었음직한데 이제는 관리하기도 참 버겁겠다는 걱정으로 이어진다. 담의 끝자락 이켠과 저켠에는 대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바람결에 댓잎소리 사각거린다. 그럴 때마다 일찍 보금자리를 찾아온 비둘기들 한번 날갯짓하며 두런거린다. 마치 담양 내 고향 같은 정경이 여기에 펼쳐진 것이다.

 제일 먼저 있는 곳이 사당인데 담장을 네모지게 쳐서 추모와 영성의 공간으로 두고 그 뒤에 다시 담을 막아 사람의 살림집이 들어선 구역의 경계가 확고하게 보인다. 대문과 사랑채, 그리고 안집으로 구조가 구분되고, 그 곁에는 또 하나의 안중사랑채를 가지고 있다. 하니 “ㅁ”자 구조라 할 수 있는 형식이다. 남도의 방식이 한 일자나 ㄴ자 모양을 하는 것과 조금은 달라 보이는 양반집의 구조이다.
경사를 운율로 넘는 담양담.

▲남도 곳곳에 남은 청렴리의 흔적들
 
 이쯤 집 구경을 마치고 전체를 돌아볼 양으로 한 바퀴 빙 돌아 차를 타고 남도로 돌아오는 길 그 집 주인을 생각해 본다.온다. 석담이라는 호를 쓴 이윤우는 1569년에서 1634년에 생을 살아간 이다. 광주이씨로 이곳이 고향인 그는 인조때 담양의 부사를 역임하며 학문을 연찬하고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에게 칭송을 받았던 인물이다. 더군다나 청렴하기 그지없어 그가 부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 담양사람들이 전별의 아쉬움을 여러 가지 사례로 답하려 하자 모두 뿌리치고 돌아갔다고 한다.

 담양에서는 다시 한 번 그의 인품을 흠모하며 고마움을 표할 방법을 찾다가 20여명의 사람들이 칠곡을 찾아 갔다. 마침 담장이 허물어진 것을 보고 이곳에 담양의 방식으로 돌담을 쌓기 시작했고, 농사일을 거들어 주었다고 한다.

 이런 아름다운 일이 회자되며 이 집이 담양담집으로 명명되었음이니 오늘 날 호남과 영남의 교류를 달빛동맹이니 달빛소나기니 해서 빛고을과 달구벌의 만남으로 이어가는 것도 길게는 여기에서 연원을 찾아 볼 수 있을 터이다.

 순천의 팔마비가 떠오른다. 이 또한 어진 선정을 베푼 부사에게 고마움을 표하고자 하니 손사래를 치며 갔던 사또에게 주민들은 관례대로 여덟 필의 말을 집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러자 이를 받은 사또는 마침 말이 망아지 한 마리를 낳으니 이 새끼까지 돌려 보내주었다고 해서 팔마비가 순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청렴리의 표상들이 남도에는 또 장성 백비의 주인공 아곡 박수량도 있으니 먼데서 귀감을 찾을 일이 아니고 바로 우리 곁에 공직의 모범 답안이 있음을 헤아려 보아야 겠다.
사당.

 다음날 담양에서 이윤우 부사의 행적을 찾아본다. 책방과 외부만 다니느라 못 본 관방제림의 단풍도 보고, 죽녹원 옆 향교를 향한다. 향교의 입구에 이윤우 부사의 흥학비가 있다. 학문을 관장하기 위해 힘썼던 그의 노력과 정책을 칭송하는 비가 담양 향교 앞에 떡 하니 서 담양에서 진정으로 영세도록 잊지 않도록 증명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네 문화는 어느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역과 세대를 넘나들며 각양 각지에 모였다 흩어지고 고여지며 큰 맥을 이었던 것이 아닌가.

 칠곡의 담양담을 보며, 담양의 흥학비를 보며 내안에 갇혀져 있던 소 지역주의를 어서 벗어 버려야 겠다는 생각이 한가득 밀려오는 계기가 되었다.
전고필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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