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호남 연홍미술관 관장

▲ 선호남 연홍미술관 관장.
 “편하게 앙그씨요.”

 휘둘러봐도 의자라곤 없는데. 그가 먼저 폭삭하니 앉는다. 전시장 바닥에 그렇듯 천연스레 앉는 모습도 그라는 사람을 말해 준다. 연홍미술관 관장 선호남(58)씨.

 연홍도에 닿는 배가 내건 ‘섬나라 미술여행’의 중심에 있는 연홍미술관을 일구고 지켜오고 있는 이다.

 미술관에 닿기까지 골목길 담벼락에 펼쳐진 작품들도 그의 손길과 마음을 담고 있다.

골목 담벼락에서 말 건네는 정다운 작품들

 고흥 녹동이 고향으로, 화가이자 고흥민예총 회장으로도 활동했던 그가 연홍도에 들어온 때는 2005년. 미술관의 꿈을 처음 일구었던 이곳 출신의 늦깎이 화가 김정만씨와의 만남이 그를 이곳으로 이끈이래, 연홍미술관은 그의 운명이 되었다.

 시련도 있었다. 2012년 태풍 볼라벤으로 미술관의 모든 게 무너졌을 땐 주저앉고 싶었다. 그를 일으켜 세운 힘은 결국 사람이었다.

 “이곳 어머니들과 쌓인 정이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떠나거나 포기 할 수 없었죠. 농사지은 깨며 콩이며 참기름이며 무시로 갖다앵기는 분들 덕에 앉아서 농사 잘 짓고 있어요. 어르신들의 삶에 담긴 치열함과 넉넉한 인심에서 배운 것들이 많아요. 늘 그 분들한테 위안을 받고 힘을 얻습니다.”

 일하는 틈틈이 마실을 즐기는 그. 무시로 어느 집이든 들어서서 아들마냥 식구마냥 이무롭게 섞인다.

 “자네 나갈라문 우리도 데꼬 나가.”

 행여 그가 섬을 뜰세라 짐짓 협박성 발언을 하는 어매들과 어우러져 사는 복을 누리고 있다.

 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마을 바깥에서 찾아드는 이들과도 소중한 인연들이 늘어가고 있다.

 “섬 안에서 세상을 두루 만나고 있어요. 이 섬과 미술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바깥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더라고요. 덕분에 사람 농사 잘 짓고 있습니다.”

 아내의 응원도 늘 든든한 힘이다. 충청도 서산이 고향인 아내 장경실(58)씨는 연홍도 아낙이 되어 살고 있다. 카페와 펜션 등 미술관 안살림을 꾸리는 동지다.

늘 돈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

 연홍미술관 앞에 붙은 ‘섬in섬’이란 수식은 거금도에 딸린, 섬 속의 섬이란 의미. 섬이라는 어려운 여건에도 연홍미술관은 한 해에 10건 정도의 전시를 꾸린다.

 “자주 오는 방문객한테 매번 똑같은 전시를 보여주기는 미안하잖아요. 전시관이 항상 동적으로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으니까요.”

 전시 기획부터 작가 섭외와 전시 설치, 관람객 맞이까지 두루 그의 몫이다.

 “공간을 꾸려내는 운영자 입장은 항시 어렵죠. 전시만 해도 섬이라서 일정변경이 불가피한 경우들이 종종 있죠. 배에 차량을 싣고 작품을 들여와야 하는데 태풍 때문에 배가 못뜬다거나 하는 일들이 가끔 생기니깐요.”

 미리 연간 전시계획을 세우는데 작년 같은 경우 ‘지역의 숨어있는 작가 발굴’이 컨셉이었다면 올해는 전업작가 중심의 전시로 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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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년에는 극사실주의 작업들을 조명해볼 계획이다.

 “정작 제 그림은 못 그리고 개인전도 못 열고 있네요.”

 대신 가슴속에 날마다 쌓아가고 궁글려가고 있을 터이니 어느 날 자연스레 그것들이 끄집어내질 게다.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예술의 섬에 정작 작가들의 작품은 부족해요. 조각공원이나 해양트릭아트미술관도 구상중입니다.”

 그가 벌이는 일에는 늘 돈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고 사업이 아니라 예술이 중심이다.

 “지역이나 조직에 돈이나 사업이 들어오는 순간, 건설 중심의 사업에 치우치거나 공동체가 많이 흔들릴 수 있어요. 주민참여나 공동분배 같은 공동의 가치들이 함께 가야죠.”

 외지인의 입장에서 ‘가고 싶은 섬’도 좋지만, 섬을 사는 한 주민으로서 그가 먼저 눈밝게 살피는 것은 섬마을 사람들의 삶이다. 바닷가에 선 조형물에 새겨진 ‘커져라 모두의 꿈’이란 말처럼.
글=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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