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가 된다는 것은 나비의 공포도 떠안는 것
연민, 이기적인 공포를 먹고 자라나는 이타심

▲ 꿈은 오묘하다. 세상 무엇보다 헛되지만 삶과 매우 깊고 중요한 관련을 맺고 있다. 어떨 땐 현실보다 더 진실하기도 하다. 마츠모토 시오리, ‘호접환몽’
 장주는 꿈속에서 한 마리 나비로 변한 자신을 보았다. 행복하게 날아오르는 나비는 아주 유쾌하고 만족스러워 자신이 본래 장주였음도 깨닫지 못했다. 홀연히 잠에서 깨어나 보니, 놀랍게도 자신은 장주였다. 장주가 꿈속에서 나비로 변한 것일까? 나비가 장주로 변한 꿈을 꾼 것일까? 장주와 나비는 분명 다른 존재다. 이것이 바로 ‘물화’이다.” … “꿈을 꿀 때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꿈속에서 자신이 꾼 꿈에 대해 점도 쳐본다. 꿈에서 깬 후에야 자신이 실은 꿈을 꿨던 것임을 알게 된다.
- 장자 ‘제물론’ 中

호접은 진정 아름답고 환상적일까

 장주는 꿈에서 깨어나고도 한참 몽롱했다. 찰나에 절망감도 지나갔다. ‘조금 전까지 자유로이 날던 나비는 내가 아니다.’ ‘난 무거운 두 다리로 지상에 묶인 시시한 인간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으니. 꿈과 현실은 다르다. 장주는 그걸 잘 알았다. 하지만 정말 그 나비는 내가 아닌가? 잠깐 동안의 환상이 준 짜릿함과 행복, 그것은 어차피 진짜가 아니니 헛될 뿐인가? 그러나 곧 그는 깨달았다고. 나와 만물이 실은 하나라는, ‘물아일체’의 깨달음을. 인간은 꿈을 꾸는 존재. 꿈은 참 오묘한 것이다. 세상 무엇보다 헛되지만, 삶과 매우 깊고도 중요한 관련을 맺고 있다. 어떨 땐 현실보다 더 진실하기도, 물론 가끔은 그저 터무니없기도.

 그러나 행복은 잠시 접어두자. 물아일체의 경험은 정말 아름답고 환상적일까? 조이스 캐럴 오츠의 ‘인형’이라는 단편이 있다. 주인공 플로렌스는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명예도 있는 중년 여성이다. 그녀는 어릴 적 생일선물로 호화로운 인형의 집을 받는다. 그 집은 아주 정교하고 사실적이어서 마치 현실에 있을 것만 같았다. 어린 플로렌스는 늘 인형의 집을 가지고 놀았다. 원래 갖고 있던 자신의 인형들과 함께.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낯선 마을을 지나던 플로렌스는 그 집과 완벽히 똑같이 생긴 저택을 마주하고 까무러친다. 그날 밤 꿈속에서, 그녀는 저택 안으로 들어간다. 집 주인은 어릴 적 데리고 놀던 빨간 머리 남자인형과 똑같은 붉은 곱슬머리. 플로렌스는 그에게 뺨을 얻어맞고 온갖 수모와 모욕을 당한다.

 생일 아침 인형의 집을 처음 본 소녀는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섬뜩할 만큼 진짜 같아서였다. 소녀의 유년 시절을 장식할 근사한 선물이자 근사한 기억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 그녀는 집에 인형들을 가져다 놀았다. 한 인형은 반짝이는 금빛 곱슬머리와 풍성한 속눈썹 아래,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동그란 파란색 눈이 박혀 있는 여자아이였다. 다른 인형은 주근깨투성이의 붉은 머리 남자아이로 데님 멜빵바지와 격자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다. 수선을 피우고, 속닥거리고, 야단을 치고, 인형들 사이의 대화를 지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 듯 ‘바살러뮤’라는 이름이 생각났다. 바살러뮤는 이 집 주인 가족의 성이 되었다.
인형의 집은 그녀의 보물이었다. 가파른 빅토리아풍 지붕과 아기자기한 테두리 장식과 많은 창문, 근사한 베란다와 그 위에 올린 목제 흔들의자들, 의자마다 놓인 깜찍한 쿠션들까지. 플로렌스의 집에 찾아오는 손님이라면 누구나 경탄했다. ‘어머, 아름답네요!’ ‘거의 진짜 집처럼 크잖아?’ 하지만 물론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건 높이가 90센티미터쯤 되는 인형의 집일뿐이었다. … 그로부터 40여년이 흘러, 플로렌스 파는 한 번도 와 본 적 없고 아는 바도 없는 도시인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의 이스트 페인라이트 거리를 지나다가, 길가 저편 느릅나무 그늘이 드리운 언덕 위에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은 옛 인형의 집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건 그냥 집이었다. 사람의 집. 인형의 집은 그 집의 모사품이었던 것이다.
- 조이스 캐럴 오츠, ‘인형’ 中

강하기 때문에 약함이 무섭다

 꿈은 왜 우리 머리맡에 찾아오는 걸까? 난 호접지몽 이야기가 인간의 ‘비상’에 대한 욕망이라고 생각했었다. 훨훨 나는 공상을 하던 애였으니까. 그래선지 자주 나는 꿈을 꿨었다. 꿈의 역할과 기능이 꼭 욕망의 분출구만은 아니겠지만, 분명 필요한 것이 꿈속에 나타날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무언가를 보여준다. 플로렌스가 꾼 꿈이 어쨌건 그녀 자신을 위해 꼭 필요했기에 찾아온 거라고 가정해본다. 그녀의 무의식 속에 인형의 집은 왜 그토록 깊고 강렬한 모습으로 존재해야 했을까? 그것은 바로 ‘공포’다. 플로렌스는 어리고 유약한 것에 대한 공포를 가진 사람. 내면 깊은 곳에 버려진 어린 소녀는 현실의 그녀를 대신해 오랜 시간 그 집에 갇혀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가 집 밖으로 걸어 나온다. 그리고 현실의 플로렌스와 자리를 바꾸려 한다.

 물론 이런 밑도 끝도 없는 공상에 근거는 없다. 하지만 공포라는 무시무시한 괴수는 근거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플로렌스는 강한 사람이지만, 아니 강하기 때문에 ‘약함’이 무섭다.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튀어나올 미숙함, 돌발적인 상황에서 발현될 어리석음. 이런 것들이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한다. 인형의 집 안에 살고 있는 소녀는 내가 아니야. 애써 외면해왔건만, 꿈처럼 그 집은 나타났고 이제야 괴수는 둘을 가로막으며 키득키득 웃으며 묻는 것이다. 둘 중 진짜가 누구야? 하지만 애초에 진짜와 가짜의 구별은 없다. 현실의 내가 아무런 이유 없이 나이듯, 그 집 안의 나 또한 어떤 이유도 필요로 않고 그저 나이기에. 소녀는 말한다. ‘이 고통은 처음부터 네 거였어. 네가 내게 맡긴 거잖아.’
나비가 되는 것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 추락의 두려움, 사냥당할 공포, 미물의 덧없는 삶, 그 모든 것이 내 것이 되기 때문이다. 명나라 화가 육치, ‘몽접(夢蝶)’

 그녀는 불안했다. 붙잡을 만한 연단도, 읽을 수 있는 강의안도, 흉내 낼 자기 자신도 없다. 지독한 웃음거리가 될 판이었다. 집 안에서 분명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을 텐데……. 초인종을 누르고 대체 뭐라고 말한단 말인가? 전 그냥 이 집을 봐야 해서 왔어요. 설명 못할 힘에 이끌려서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너그럽게 봐주세요. 제가 기억하는 그 집이 맞는지 안을 보고 싶을 뿐이에요……. 이런 집을 저도 갖고 있었거든요. 당신 집이었죠. 하지만 제 집에는 인형들만 살았어요. 인형 가족이요. 저는 인형들을 정말 좋아했지만, 걔네들이 항상 뭔가를 가로막는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저와 무언가의 사이를 막고 서있다는 느낌이…….
하루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판에 박힌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진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챔플레인 대학 총장인 플로렌스 파라는 것도, 소형 사립 인문대 경영자들의 학회에서 특별 연사를 맡고 있다는 것도. 어쩐지 다른 사람을 사칭하는 사기꾼이 된 기분이었다. 인형의 집이 자꾸만 뇌리에 아른거렸다. 그 경험이 얼마나, 얼마나 기이했는데,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 시끌벅적한 칵테일파티에서도, 만찬 때에도, 그녀는 어딘가 다른데 정신이 팔린 듯한 자신의 목소리가 통상적인 사안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마음은 저 밖의 이스트 페인라이트 거리로, 그 인형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 조이스 캐럴 오츠, ‘인형’ 中

공포라는 이기심, 연민이라는 이타심

 내 안에 정말 여러 내가 살고 있으려나? 그렇다 해도 결국 그 자아들은 모두 나라는 인간 하나로 귀결된다. 무거운 몸 하나에 묶여 멀리멀리 날아갈 수 없는 그들은 아마도, 장기판 위의 말이면서 동시에 그렇지 않은 존재들이겠지. 만약 인간이 자신의 뇌를 100% 쓸 수 있는 날이 온다면, 하드웨어를 따로 쓰듯 이들을 장기판의 말로 움직일 수도 있을까. 쓸모없이 버려지거나 방치될 자아들도 분명 있겠지, 생각하면 그야말로 ‘가엾다.’ 참. 이게 인간이다. 무엇에든 쉽게 값싼 연민을 적선한다. 언젠가 인간은 오래 살기 위해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통속의 뇌를 몇 백억 개고 만들어낼 테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연민 또한 느끼게 되겠지. 그 재수 없고 기만적인 연민은, 어쩌면 그 통속의 뇌가 나일지도 모른다는 ‘지성체’로서의 공포에서 기인한다. 그렇다. 연민의 근원도 공포인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궁금해 한 적이 있다.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들은 어디로부터 왔나?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귀여움의 근원은 번식욕구다. 요즘은 사람들이 숨 쉬듯이 귀엽다는 말을 뱉는다. 전혀 귀엽지 않은 것에도 서슴지 않고. 당연히 그게 다 번식욕구 때문만은 아니지. 하지만 ‘귀엽다’라는 단어를 들으면 곧바로 연상되는 사물은 보통 작고 연약한 것들. 아기가 대표적이다. 대상을 아기로 정하니 감정의 목적이 명확히 드러난다. 아기를 귀여워하는 것은 ‘번식하라’는 DNA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 아휴 귀여워라! 지켜줘야지, 갖고 싶다, 낳고 싶다. 태곳적 귀여움은 모두 아기들 독차지였을 테다. 그러고 보면 귀여움, 연민. 모두 인간의 생존욕구로부터 비롯된 이타심들.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이 감정들은 인류에게 다수생존과 종의 번성으로 보답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귀여움의 나뭇가지는 사방팔방으로 뻗었다. 지금 우린 덩치 큰 남자나 수염 덥수룩한 아저씨도 귀엽다고 한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귀여운 것 중 최고는 ‘불쌍한데 귀여운 것’이다. 그냥 불쌍한 것이나 그냥 귀엽기만 한 것은 참을 만 하다. 하지만 불쌍한데다 귀엽기까지 한 것은 견딜 수 없다. 난 그런 걸 보면 숨이 가빠진다. 막 태어나 제 몸 못가누고 버둥대는 새끼강아지를 보면, 1초 남짓한 순간에 어떤 강렬한 감정이 빠르게 지나간다. 심장이 미친 듯이 간지러운 느낌, 빨리 내 다리라도 한쪽 잘라주고 싶은 심정. ‘내가 왜 이러는 거지?’ 분명 이 감정은 어딘가 아주 지독하고 강력한 기억에서 기원하리라. 그건 내가 아주 작고 약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을 때의 기억이다. 세상에 태어난 우리는 모두 아기였다. 아기가 아니었던 사람은 없다. 그저 먹고 싸는 자그마한 것. 아주 약한 힘에도 부서질 수 있는 것. 나를 지킬 힘도, 사유할 능력도 없는 것. 막연하고도 강렬한 공포가 조그만 몸뚱아리를 강하게 옭아매고 있었다. 그 공포는 아직도 우리의 무의식 속에 깊이 잠들어있다.

 “……바살러뮤 가문이요. 물론 아주 오래전이었지만요.”
 “바살러뮤 가? 이 근처에 살던 사람들이라고요?”
 “음, 네. 그럴 거예요. 실은 그래서 제가 여기 들른 거예요. 어렸을 때 알던 여자애가…….”
 “바살러뮤, 바살러뮤라.”
 붉은 머리 남자는 무례하게 히죽거리며 그녀를 굽어보고 있었다. … 순간 그가 힘차게 손뼉을 쳤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플로렌스는 눈을 껌뻑였다. 그는 몸을 앞으로 내밀더니 그녀의 얼굴 바로 앞에 대고 또다시 손뼉을 쳤다. 그녀는 눈에 눈물이 불쑥 솟아나는 걸 느끼며 자신을 가만히 놔두라고 비명을 지르고 쿠션에 몸을 파묻어 고개를 최대한 뒤로 젖혔지만, 남자가 다시 그녀의 얼굴에 손을 들이대고는 화끈거리는 그녀의 두 뺨을 양손으로 동시에 짝 하고 쳤다. 작열하듯 뜨거운 감각이 날카롭게 그녀의 전신을 꿰뚫었다. 그녀는 그만하라고 소리 지르며 붉은 머리 남자에게서 빠져나가려고 소파 위에서 몸을 발작적으로 뒤틀었다. … ‘거짓말쟁이! 못된 년! 더러운 년!’ 누군가가 고함쳤다.
- 조이스 캐럴 오츠, ‘인형’ 中
세상에 태어난 우리는 모두 아기였다. 막연하고도 강렬한 공포가 조그만 몸뚱아리를 강하게 옭아매고 있었다. 그 공포는 아직도 우리의 무의식 속에 깊이 잠들어 있다. 렘브란트, ‘가니메데의 유괴’

사슴이 된 장자, 악몽이 준 깨달음

 약육강식의 세계에 산다고들 하지만 기본적으로 약자를 연민하도록 진화해온 우리다. 그러나 자식이 어머니 뜻대로 곱게만 자라나지 않듯, 생존을 위해 태어난 인간의 원초적 감정들은 제멋대로 가지를 뻗었다. 귀여움과 동떨어진 것들을 기꺼이 귀여워하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바보처럼 공포에 떤다. 플로렌스는 인형의 집 소녀를 연민했고 동시에 두려워했다. 언젠가 소녀는 내 인생 전부를 요구해올 것이다. 그러면 인형의 집 속 벨벳 소파 위로 나는 쫓겨나겠지. 아니 실은 그게 진짜 나일지도 모른다. 슬프다. 너와 나의 연결고리는 연민이라는 이타심, 그러나 그것은 결국 이기적인 공포로 이루어진 것. 물아일체는 무서운 말이다. 나비가 된다는 것은 나비의 공포도 떠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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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자들의 눈으로 보자면 나와 탁자의 구분은 없고, 탁자와 너의 구분도 없으니, 따라서 나와 너의 구분도 결국 없다. 이런 식으로 만물이 모두 하나다. 물아일체의 진의는 벽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벽 따위는 없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는 것. 아니 ‘체험당하는’ 것. 흥취만을 논하는 자들은 벽에 머리를 부닥치는 이 고통을 외면하겠지만. 나는 자꾸만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는 장자를 상상하게 된다.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사슴이 된 장자. 기쁨, 행복, 강함만을 취하고 불행, 공포, 약함은 버리는 것은 합일이 아니다. 아니 합일이란 것이 만약 가능하다면, 모든 걸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초유의 경험일 것이다. 생생한 악몽이 주는 깨달음은 어떤 색일지, 과연 그 깨달음도 낭만적일지 궁금하다.

 퍼뜩 깨어보니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온몸이 땀에 푹 젖어있었고, 그녀의 몸은 침대 머리 판에 기댄 채 뒤틀린 자세로 널브러져 있었다. 충동에 못 이겨 인형의 집을 보러 간 꿈을 꾸었는데, 물론 그건 꿈일 뿐이었다. 그녀는 내내 호텔 방 안에 있었으니까. 호텔 방을 떠난 적이 없었으니까.

 축하 인사와 악수가 오고갔다. 플로렌스는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여 안도감과 기쁨으로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이곳이 그녀의 세상이고, 이 사람들이 그녀의 동료였다. 그들은 그녀를 알았고, 존경했다. 무엇을 걱정한단 말인가! 아득히 멀리서 그녀를 조롱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거짓말쟁이! 더러운 년! … 지난밤의 오욕과 불쾌감은 희미해져갔다. 인형의 집 역시 기억에서 희미하게 사그라들었다. 돌이켜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두 번 다시 생각도 않을 것이다. 깨어있는 시간만이 현실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알고 있었다.
- 조이스 캐럴 오츠, ‘인형’ 中

 들판을 날아다니는 나는 복도 위를 걷는 너를 이해하여야 할까? 동시에 들판에도 복도에도 우리는 있어야 하는 걸까? 그래야 내가 너를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나와 너로 나누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이유, 동시에 그 벽을 허물 당위, 그 두 가지를 알고 싶다. 나를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너의 절망을 떠안게 될 공포, 이 두 가지는 이미 알고 있다. 나비가 되는 것은 결코 아름답거나 환상적이거나 환희에 찬 꿈결 같은 경험이 아님을. 추락의 두려움, 사냥당할 공포, 미물의 덧없는 삶, 그 모든 것이 내 것이 되기에. 그러나 벽이든 세포막이든 문짝이든 가로막고 있음에도, 그 너머 당신에게 닿고자 하는 욕구를 들여다본다. 꿈에서 깨는 날 손에 열쇠를 쥐리라. 풀숲에 누워 당신을 기다리겠다.
김연우 <조선대 국문과 4년, 인문학공간 소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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