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단례
당신꽃 필 무렵-무안 어매들의 삶이야기 모음집

▲ “상치가 보드라와갖고 여간 좋아. 갓도 잔 주까?” 항시 앵겨주고 나놔주고 싶은 맘으로 사는 김단례 어매.
 <이 세상에서 제일 세고, 제일 강하고, 제일 훌륭하고, 제일 장한, 인생의 그 숱하고도 얄궂은 고비들을 넘어 매일 ‘나의 기적’을 쓰고 있는 장한 당신을 응원합니다. 이제는 당신꽃 필 무렵!>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마지막회에 붙은 헌사다.
 “왜 나를 숭글 디가 없어 여기다가 숭궈 놨나” 싶은 돌밭에서 스스로 일어나 꽃이 된 어매들한테도 바치고 싶다.
 무안여성농어업인센터에서 한글을 배우는 어매들의 삶의 이야기를 옮겨 쓴 모음집 《시방은 암것도 안 무솨, 글자를 안께!》. 글자를 알기 전에도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암것도 안 무솨’라는 불굴의 정신으로 살아왔고, 호강질(길)은 몰르고 고생질(길)로만 건너오면서도 발 디딘 자리에서 한사코 꽃을 피워내며, 가난하면서도 각박하지 않았고, 항꾼에 나누고 퍼주는 버르쟁이를 고치지 못한 어매들의 이야기다.
 강맹순 강영희 강정례 김고만 김단례 김연례 김옥금 김정순 김포접 김화엽 노정임 박삼녀 박은심 안덕심 안미순 유숙희 윤명애 윤연임 이경자 이백임 이삼임 이윤심 이현임 임춘금 전덕례 전정순 정광순 정매신 정정례 정춘심 주순례 최단임 최순례 최영자 김귀심 김옥자 김옥희 김순자 배대례 신금자.
 땡볕과 폭우와 거센 바람 속을 지나온 생애의 시간 속에서 핀 당신꽃들의 말씀을 새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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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치가 보드라와갖고 여간 좋아.”

 밭에 엎드려 있던 김단례(77·해제면 신정리 고읍마을)어매는 보자마자 상추다발부터 앵긴다.

 “갓도 잔 주까?” 말려도 소용없다.

 “나는 버르쟁이가 놈 주는 버르쟁이여. 주고자프문 고놈을 줘불어야 살아. 맘을 한번 묵으문 기언코 해야 돼. 안 주문 자꼬 애닳고 떠올라. 줘도 다 묵고 살아. 안 굶어. 쥐고 살아도 갈 때는 다 빈주먹으로 가. 우리 아저씨도 욕심없었어. 근께 놈 준다고 서로 타시락거릴 일은 없었어. 자식들도 어매 아배 성질을 탁했어. 주기를 좋아해. 조깨 손해 보고 살아도 돼. 나코 그 복을 받아.”

 ‘나코’(나중에)라는 불특정 미래의 복을 믿고 오늘 몫의 퍼주기를 게을리하거나 주저하지 않는 어매.

“놀문 큰일날줄로 알고 살았당께”

 “키가 빨리 커불어갖고 너모 애렸을 때부터 일을 했어.”

 일의 이력이 오래 됐다.

 “여섯 살부텀 실을 잣고 열세 살부텀 베틀에 올랐어. 열다섯엔 제대로 짜고.”

 막내딸 단례는 무단시 일이 하고자웠다.

 “성님들이 베틀에서 내로문 얼른 올라가서 짜고.”

 틈을 엿보고 있다가 뽈딱 일어서서 차지한 자리가 노는 자리가 아니라 일자리, 고생자리였다.

 “동네서도 소품 갚아야 할 적이문 나보고 오라고 했어. 일 야물게 잘한다고.”

 어린 단례는 동네방네 소문난 일꾼이었다.

 “이날 팽생 일을 안하문 큰일날줄로 알았당께.”

 노는 일이 가장 어려웠던 한생애다.

 “물이 존께 가그라.”

 시집 오기 전 친정어매가 했던 말씀이다.

 “여그 저수지 욱에 냇물이 좋았어. 우리 친정동네는 물을 데려서 묵었는디.”

 ‘물이 존께’가 시집 올 중대 사유가 되었다. 우여곡절이야 있었다.

 “우리 성님이 그 집으로 선을 보러가서 뒤안으로 돌아가본께 새내끼가 주렁주렁하니 할매 제사가 있더라고. 긍께 걱정을 했제. 근디 거그 한동네에 이모랑 이숙이 살았어. 저 머스마가 꼭 쓰겄응께 놓기 아까와서 누나가 곧 미국으로 간께 하던 가게 밀어주고 간다고 시집을 오라 그래. 우리집에 머스마가 선을 보러 왔는디, 내가 미싱바느질하고 있다가 내다본께 인물도 잘 생갰습디다.”

 그 뒤로 그 머스마가 서울을 다녀온다며 양간다리로 나오라해서 만난 적이 있다.

 “우리 성님하고 나가서 식당가게에서 만났는디 이몽크림을 하나 사주대.”

 이몽크림은 1960년대 인기였던 미백크림 상표.

 그 머스마가 파마를 해보라고 그러더란다. 그 머스마가 맘에 안 들었었다는 어매는 어쩐 일인지 그 머스마 말대로 파마를 했다.

 “친정오빠가 나를 이뻬했어. 근디 일만 겁나게 시키묵어갖고 미안하다고 시집갈 때 줄라고 금비네를 맞촤다 놨는디 내가 느닷없이 파마를 해분께 겁나게 서운해갖고 얼매나 화가 났어. 오빠가 미싱대가리를 빼다 감촤불어서 할 수 없이 다른집에 댕김서 바느질해갖고 시집을 왔당께.”
스물세 살이던 해 섣달 열이렛날에 시집을 왔다.

 “근디 시집와서 본께 그러코 부자도 아니더라고. 우리 이모가 거짓말을 서 말을 해불었더라고.”

 거짓말의 양도 곡식을 세는 단위 ‘말’.

 “이모한테 왜 존 말만 했냐고 따졌더니 머시마가 하다 존께 아까서 그랬다네.”

 신랑신부는 결혼하고도 한동안 서로 낯을 가렸다. 서로 부끄러울 일이 무단시 많았다.

 “밤이문 잠자리를 자기 거 따로 깔아주고 나도 따로 깔고. 근디 따로 깔지마란 소리도 않대. 자다가 발 뻗을깨비 조심스러웠제. 그래도 애기는 어쩌고 났어라, 하하. 긍께 자다가도 생갰능갑제. 한참 살고 나서도 그때도 부끄롸.”

 시집와서 3년쯤 되었을 때였다.

 “그 남자가 뭔 일로 집을 한 사나흘 떠났다가 돌아왔는디 코에 뭣이 나갖고 왔어. 콧뎅이가 부서논께 자기도 부끄롸서 나를 못 쳐다보고 나도 부끄롸서 자기를 못 쳐다보고. 얼른 밥만 차라주고 정제에 있다가 잠이 든 뒤로 방에 들어갔당께.”

 남편 이병한은 순하고 착실하고 다정한 양반이었다.

 “정 없이 살그나 그러든 안했어. 신랑이 겁나게 얌잔해. 공부는 많이 못했어도 마음 깨깟하고 영리한 양반이었어.”

 하지만 그런 양반이 한 3년 어매 속을 썩인 적이 있다.

 “제금나서 살기 팍팍한께 중간에 트랙터를 샀는디 동네점방에 사람들 모였으문 술 한잔씩을 하는 버릇이 생개갖고 술을 많이 했어. 밑자리가 찔겨갖고 끝내 앙겄고. 겁나게 얌전한 사람이라 즈그어매가 맨나 한 말이 저 아들이랑 결혼한 각시는 복둥이라고 했는디 그 말이 거꾸로 꺼꾸로 돼야붓서.”

 진정한 복둥이는 며느리였다.

 “섣달에 시집왔는디 정월 스무날이 할매 제사였어. 제사 앞두고 녹두노물 콩노물을 나보고 질르라고 하더만. 우리 친정어매가 얼매나 걱정을 했다요. 딴일은 시캐묵었어도 그런 일은 안해봤는디 선영 모실 노물을 어찌고 해낼란고 시퍼서. 큰방에 옴박지 큰 데다 노물을 질렀는디 엄청 탐지게 잘 질어불었어.”

 그래도 시집살이에 어려움이 왜 없었으랴.

 “큰애기때 우리 동네 여자들이 열 가마니짜리 보리계를 했는디 나는 나이많은께 곧 시집간다고 안딜여준다고 해서 너주라고 사정해서 끝번을 넣써. 그놈을 못타고 시집을 왔는디 시집 온 뒤에 친정으로 근친을 간께 오빠가 그 돈을 줘. 그놈을 신랑한테도 말 안하고 이불속에다 폭 너놨는디, 시아재가 보도 않앴는디 돈냄새를 맡은 모양이여. 고놈 돈을 갖고 혼수 축음기도 들고 즈그 성 갤혼할 때 맞촤준 양복까지 뽄내고 채려입고 외입을 나가불었어. 그래갖고 양복 바지 넙턱지 다 떨어지고 돈도 떨어지고 축음기도 폴아 묵어불고 돌아와서 염치없응께 집에는 못 들어오고 저어 그 동네 앞에 양간다리 당숙모네 와 있다고 그래. 그날 저닉에 시아부지가 ‘닛짜는 왔담서 왜 안 들어온대야’ 근께 나는 돈을 잃어불었어도 흔적도 없이 있는 판인디 시어매가 ‘즈그 성수 무선께 안들어오지라’ 그래. 얼매나 억울할 일이여. 그래갖고 델러 갔는디 내가 이짝으로 가문 저짝으로 숨고 광으로 가문 작은방으로 뛰어가서 숨고 한참을 그러다가 잡아갖고 집으로 둘이 말도 않고 캄캄한 질(길)을 걸어오는디 중간에만큼 온께 오매오매 너무 억울해갖고 가심이 막 차오른디 걷도 못하겄어.”

제금날 때 보쌀 한 동우, 쌀 한동우

 “애기 겁나게 났어. 근디 죽어불고 죽어불고. 애기들 나는 반틈 차지했어라.”

 그 끝에 아들 둘, 딸 둘을 건사했다.

 “시어매가 첨에는 제금이나 낼라 했다요. 근디 맨나 애가 죽은께 집안회의를 몇 번 했어. 큰동서들도 애기가 죽은께 나갔던가만. 터가 문제가 있었는갑서.”

 결국 제금을 나기로 결정했다. 정월 스무날에 애기를 낳은 뒤였다.

 “제금을 난다근께 내가 나무를 그러코 많이 해서 집이 안 자빠지게 꽉꽉 눌러쟁여놨는디 시어마니가 불도 안때줘라. 제금난다고 미와서. 나무가 그러코 많애도 한 둥치도 안주고 보쌀 한 동우, 쌀 한동우 주더만. 쌀은 종우로 된 횃가리포대에 담아줬는디 내가 곰방 애기 낳고 열흘 이짝저짝에 제금을 난께 동세(동서)가 ‘인자 애기난 사람이 어찌고 쌀을 인당가 내가 일라네’ 하고 머리에 이는디 종우가 찢어져갖고 머리가 쌀푸대 속으로 들어가붓서. 그래갖고 쌀을 토지(토방)로 다 허쳐불었당께.”

 어매는 자식들 건사하느라 안해본 일이 없다.

 “억척같이 일했제. 갯바닥에 꿀 까러 댕이고 콩노물장시도 하고. 밭 두마지기 콩을 갈문 고놈을 다 질어서 팔았어. 그전에는 저그 양간다리 신작로에서 아적마다 또깨비장이섰어. 나는 노물동우를 다섯 여섯 개썩 질러갖고 돌아감서 내다폴았제. 우리 큰딸이 초등학생이었는디 아침에 학교감서 가방 지고 노물동우를 이고 댕기느라 키가 안 컸다고 맨나 말해. 아적에 한 동우썩을 나 이고 가고 저 이고 가고 그랬제.”

 남편은 장에 가면 생전 빈손들고 안오고 애기들 먹을 것사오던 사람이었다. 또 제금을 나면서부터 생일선물을 사준 사람이었다.
“생전 채근하거나 타박하는 소리를 못 듣고 살았제. 내가 아픈께 언제 죽을지 모르겄다 싶어서 신협에 천만원이 있다고 말을 한께 어디서 나 몰래 돈을 만들어 넣었냐고 묻지도 않은 사람이여. 장모님이 집에 오신다문 신발부텀 사갖고 와. 신발바닥을 다 몬차봐갖고 사갖고 오던 사람이여. 나이든 장모님이 행이라도 미끄러지고 자빠질깨비.”

 그리 다정하고 사려깊은 사람이었다.

 “남편이 술마시고 댕개서 속 썩일 때 내가 초등학교만 나왔다문 당신하고 안살겄소야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미운소리 하니라고. 근께 나를 찬찬히 쳐다봄서 자네는 어찌 그리 후회를 한가 나는 자네하고 결혼해서 당아 후회해 본 적이 없네 그러더라고. 그러코 점잖코 이쁘게 말을 한께 너모너모 미안하더라고. ‘내가 못된 말을 했다 이미 자석 낳고 삼서 왜 그런 말을 했으꼬’ 싶어서 그 뒤론 절대 싸움을 안했어.”

 남편(이병한)의 사진이 어매의 머리맡 위에 놓여 있다.
“항시 쳐다봐. 아파서 삼일만 내가 간호만 해줬더라도 이러고 서운하든 안 했을건디. 병원에서 치료한다고 귐기기만 했제, 그러다 난데없이 급재기 가불었어.”

 어매는 남편이 세상을 뜬 뒤 한동안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텔레비전도 보기 싫고 누구하고도 이야기도 하기 싫었다. 그러면서 일기를 썼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그 일기를 얼마 전에 다 태워버렸다.

 “새끼들이 난중에라도 보문 눈물뺄 것을 뭐더러 놔둬야 하고 꼬실라불었어.”

 살아온 세월 굽이굽이 험한 일 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놈부끄런께’ 숨기고 삼가며 살아왔다는 어매.

 “놈부끄러서 저닉에 애기 나문 아직에 인나서 일하고. 그런께 삭신이 다 망가졌제. 내가 아파도 놈부끄럽고 남자가 몬자 죽어도 놈부끄럽고.”
부끄러울 일도 아니건만 혼자 놈부끄러운 일이 많던 것이,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혼자 견디고 이겨내는 버릇으로 이어졌다.

 “나는 흔적도 안해”라는 어매 말이 아프다.

글=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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