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이 만난 사람] 고려인 3세 문 빅토르 화가
고려인마을에 평생 작품 모아 내달 미술관 개관

5일 광주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종합지원센터에 마련된 작업실에서 만난 문 빅토르 화가.
5일 광주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종합지원센터에 마련된 작업실에서 만난 문 빅토르 화가.

 고려인의 역사와 자신의 뿌리를 찾아왔던 고려인 화가 문 빅토르의 여정이 광주에 도달했다. 그는 조상의 땅에서 평안한 마음으로 미술 작업을 이어가며 여생을 보내고자 하고 있다.

 조상의 땅에 영주할 것을 꿈꿨던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화가 문 빅토르 화백(72)이 지난달 31일 마침내 광주 고려인마을에 정착했다.

 태어나 자라 온 카자흐스탄의 주거공간을 정리하고 그동안 그린 그림들을 한아름 꾸려 광주 고려인마을에 도착한 그는 “광주 정착 고려인동포들과 함께 할 수 있어 매우 기쁘다”고 밝혔다.

 앞서 고려인마을은 미술관 건립이라는 문 작가의 꿈을 위해 지난해 6월부터 모금운동을 진행했지만 모금액이 목표액에 미치지 못해 미술관 건립은 무산되는 듯 했다.

 그러나 그를 환영하는 고려인들의 뜻이 모여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 한 켠이 그의 작업실과 주거공간을 갖춘 미술관으로 마련됐고, 오는 3월 1일 그의 대표작들을 만나볼 수 있는 전시실을 조성해 ‘문빅토르미술관’이 정식 개관할 예정이다.

 5일 본보가 찾은 그의 작업실은 넓은 탁구대 위로 펼쳐진 화려한 색감의 작품들이 눈에 띈다. 큰 유화 작업을 할 넓은 책상이 없던 터라, 주민들이 고심해 마련해준 소박한 작업대다.

 작업대 위 많은 작품들 가운데, 여러 얼굴이 이어지는 작품이 시선을 끌었다. 그 얼굴들의 가장 위 갓을 쓴 인물의 손엔 ‘문(文)’, 작가의 성이 적혀있다.

 문 작가는 “이 작품의 가장 아래 있는 인물이 접니다”라며 “이 그림은 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을 그려 조상에서부터 제 자신까지 이어지는 뿌리가 담겨있다”고 설명했다.

문 빅토르 작가의 작품. 조상으로부터 자신의 모습까지를 나타내고 있다.

 ‘남평 문씨’라고 알게된 후 더 큰 애착 

 자신의 성인 ‘문’이 어떤 문파인지 알지 못했던 그는 꽤 오랜시간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2014년 광주에 머물며 그림 작업을 하던 3개월 동안 지인에 의해 제 성이 ‘남평 문씨’라는 걸 알게 됐다.

 자신의 뿌리를 찾는 여정에 만나게 된 ‘광주’라는 도시는 남다른 애착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에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았던 2017년에는 광주 동구 우제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으며 2022년에는 고려인 동포들의 도움으로 광주에서 무릎관절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이어져 온 광주와의 인연이 올해 ‘영구 정착’으로 결실을 맺게 됐다.

 문 작가는 “카자흐스탄에선 고려인의 역사를 그린 그림이 크게 의미를 갖지 못했지만 이곳은 한 민족의 역사기 때문에 그 의미가 다르다”며 “앞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천천히 작업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카자흐스탄에서 온 고려인 3세 문 빅토르 작가는 1951년 고려인 최초의 정착지인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서 태어났다. 그는 1975년 알마티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국립고려극장 주임미술가, 카자흐스탄 풍자잡지 ‘아라쉬멜’ 주임미술가 등으로 활동했으며 카자흐스탄 대통령궁과 국립미술관을 비롯한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이집트, 일본, 러시아 등의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된 고려인 대표 화가다.

 그는 “시골이라 그저 아무 책에 그림을 그리고 놀곤 했다”며 “한번은 거리의 벽돌에 사람 얼굴을 조각했는데 비 오던 날 한 할머니가 그 조각을 보고 깜짝 놀라 쓰러지는 바람에 어머니가 집 안에서만 그림을 그리라고 했던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

 그가 그림을 시작하게 된 것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머니는 서예를 잘했는데 주변에 그림 그릴 줄 아는 지인 분들한테 조금씩 배울 수 있었다. 형 옷을 물려입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집이었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조금씩 사준 연필과 미술재료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가 그림에 고려인들의 역사를 담게 된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들이 그의 상상력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문 작가는 “고려인들이 어떻게 강제이주 당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었다”며 “직접 경험하진 못했지만 그렇게 들은 이야기들이 우리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계속 생각하게 했고 그런 역사를 그리는 화가가 없었기에 그림을 그리게 됐다”고 말했다.

월곡고려인문화관 벽면을 장식한 타일벽화는 문 빅토르 작가의 ‘1937 고려인 강제이주열차’ 작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월곡고려인문화관 벽면을 장식한 타일벽화는 문 빅토르 작가의 ‘1937 고려인 강제이주열차’ 작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조상의 땅 광주서 고려인동포들과 함께”

 이처럼 그는 고려인 강제이주 역사와 아픔을 작품에 주로 담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2017년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아 제작한 ‘1937 고려인 강제이주열차’가 있다. 광주 고려인마을에 있는 고려인 문화관엔 이 작품을 바탕으로 제작한 타일벽화가 있기도 하다.

 또한 ‘우수리스크 우리 할아버지’는 1910년대 초반 한반도에서 연해주로 이주한 문 작가의 조부를 상상하며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엔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살았던 할아버지에 대한 그의 그리움이 담겨있다.

 역사와 뿌리를 찾아 온 그는, 긴 여정의 끝에 마주하게 된 광주에서 그가 이어 온 고려인 선조들의 민족정신과 개척정신을 후손들에게 전수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제 그림 스타일이 점을 하나하나 찍어 표현해서 작업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며 “광주에 머물게 된 앞으로는 편안한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며 미래세대를 위해 화법 전수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오는 3월 1일 문빅토르 미술관 개관식이 열린다. 이날 개관식에서 그의 대표작 ‘1937 고려인 강제이주열차’와 ‘우수리스크 나의 할아버지’, 인물화 ‘홍범도장군’에 이어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아크릴 작품 50여점도 소개될 예정이다.

 유시연 기자 youni@gjdream.com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