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학산책]간 큰 선비, 왕에게 날린 직언

본보는 한국학호남진흥원과 손잡고 ‘호남학 산책’에 실린 기획물을 연재합니다. 전문 필진이 기록한 ‘호남학 산책’의 기획물 중 ‘고문서와 옛편지’ ‘문화재 窓’ ‘풍경의 기억’ ‘彿家別傳’ 등의 코너 이름으로 실린 내용이 광주드림 지면과 인터넷을 통해 독자 여러분에게 전달됩니다. 한국학호남진흥원(www.hiks.or.kr)은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가 민족문화의 창조적 계승과 호남한국학 진흥을 위하여 2018년 공동 설립한 기관입니다. (편집자주)

여지도서에 나오는 운암사(雲巖祠).
여지도서에 나오는 운암사(雲巖祠).

 

 “동·서·남·북 분당은 전하의 마음에 있지 신하의 마음에 있는 게 아닙니다.”

 광주 무등산 자락의 화암동에 서원이 있다. 광주 시내에서 원효사 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길 오른쪽에 홍살문이 있다.

 많은 이들이 그냥 지나쳐 원효사로 향할 뿐 여기에 서서 보는 이는 많지 않다. 스쳐 지나게 되는데 그마저도 서원 담이 나무에 가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다만 길가에 서 있는 큰 돌에 운암서원이라는 글자가 있어 여기가 운암서원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연려실기술』의 <사전전고(祀典典故)>를 보면 ‘병진년에 세웠다’고 했고 송제민(宋濟民) 권필(權○) 송타(宋○) 등이 모셔져 있다고 했다.

 운암서원을 설명하는 글들에도 송제민을 주축으로 삼아 서원이 생기게 되었다고 하였다.

 송제민의 이름은 송제민(宋濟民) 또는 송제민(宋齊民)으로 쓴다. 제민(濟民)은 경세제민(經世濟民) 곧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을 구한다는 말이다.

 이름대로 송제민은 원대한 뜻을 품었다. 하지만 중년의 나이가 되어 자신의 뜻을 펼쳐 백성을 구하겠다는 포부가 좌절되었다고 여겨 제민(齊民)으로 고쳤다고 한다.

 자신도 그저 일반 백성과 다름없다는 말이다. 세상 구할 사람이라는 큰 꿈을 가진 이가 어느 날 평범한 백성으로 변신한 셈이다. 이름 바꿈에서 세상을 향한 그의 뜻과 책임감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담대함도 볼 수 있다.

 20대 청년의 큰 생각, 좌절된 포부

 담이 크면 생각도 하는 일도 남다르다. 일찍이 그는 영광(靈光)에서 해언(海堰) 사업을 시도했다. 해언이란 바닷가에 둑을 쌓는 일이다.

 밀물과 썰물로 인해 농토가 바닷물에 닿아 소금기 머금게 되면 그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다. 이미 자라난 농작물도 망가진다. 송제민은 영광 사람들이 농토에 밀려 든 바닷물 때문에 농사를 망치는 일을 목격한 모양이다. 바닷물이 더 이상 넘어오지 못하도록 둑을 쌓으려고 했다. 둑을 쌓으면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아 농토가 보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다를 막는 일은 지금도 쉽지 않다. 많은 인력과 재원이 투입되어야 한다. 기술적인 어려움도 뒤따른다.

 정약용도 『목민심서』에서 ‘우리나라는 바다도 둘러 싸여 있어서 바다에 제방을 쌓는 일이 매우 큰 정사(政事)’라고 했다. 제방을 쌓고자 한다면 무거운 돌을 가뿐하게 들어올릴 기중가(起重架)도 사용하여야 하는데 활차(滑車)나 고륜(鼓輪) 같은 것도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즉 무거운 돌을 옮길 수 있는 바퀴 달린 기계 등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또 밀물과 썰물의 기세가 지형마다 각각 다르므로 그 완급의 정도를 자세하게 살펴야 한다고 했다. 지형을 살피는 일부터 둑을 쌓기 위해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 설비들이 있어야 하며, 여기에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도 필요하다.

운암사.

 정약용도 둑 쌓는 일을 하려면 백성들을 징발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바닷물을 막기 위한 둑 쌓기는 국가 수준의 일이지 개인이 감당할 수준의 사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제민은 백성을 위해 그 일을 하려고 했다. 여기저기 관청에도 드나들고 사람들과 논의도 했을 터이다.

 유희춘은 송제민이 해언 사업을 시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다 질책했다. 유희춘은 송덕봉의 남편이다. 송제민은 송덕봉의 친정 5촌 조카이다. 송제민은 유희춘의 처가 조카인 셈이다.

 유희춘이 유배에서 풀려나 담양 대곡에 있을 때 송제민이 자주 왔었다. 유희춘은 처조카가 시도하는 일이 무모하다고 여겨 꾸짖었다.

 『미암일기』에 ‘이루지도 못할 일을 함부로 일으켰다고 질책했다.’고 썼다.

 관찰사도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송제민이 해언 사업에 완전히 빠져 있어 그 사업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송제민은 10여 일 동안 고민한 끝에 바다에 둑 쌓는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이때 송제민은 26~7세의 청년이었다.

 유희춘이 보기에 처조카 송제민은 20대의 젊은이가 무모하여 겁 없이 ‘일 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송제민은 백성을 위해서라면 무모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 만큼 담대했다.

 무모하다는 말은 다른 이들이 꺼려하거나 어렵다고 여기는 일을 할 쓰기도 한다. 송제민은 그런 일을 기꺼이 했다.

 임진왜란 때 김덕령에게 의병을 조직하여 왜적을 조선 땅에서 몰아내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자신은 제주도로 갔다.

 제주도는 조선시대 말 산업이 융성했던 곳이다. 그는 의병들이 쓸 말을 배에 싣고 와 군마로 제공했다.

 조선시대 육지에서 제주도를 가는 길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길이었다. 사방이 바다에 둘러싸여 육지로부터 뚝 떨어진 섬이어서 조선시대 유배지 중 최상등급에 속했다.

 제주도 가는 길이 험하고 육지와 멀기 때문이다.

 송제민은 위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갔다. 말까지 배에 태워 왔다. 말은 전쟁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군비였다. 의병들의 전투력을 증강하고 전투에서 이겨 왜적을 완전히 몰아내게 되면 백성들의 삶은 편안해질 것이었다. 백성을 먼저하는 위하는 마음은 위험도 생각지 않게 한 것이다.

송제민이 쓴 만언소(부분). 일본과 국교 재개 논의가 진행되던 때인 1597년 즈음에 작성했다고 한다.

 50대 중년의 담대함, 왕을 꾸짖다

 송제민의 담대함과 무모함의 최정점은 선조를 향해 날린 꾸짖음이다.

 지금 동·서·남·북 등에 관해 말하는 이들은 하북의 적을 없애는 것보다 더 어려우니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정에는 일찍이 동·서·남·북 이라는 게 없습니다. 다만 전하의 마음에 동·서·남·북 이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전하의 마음이 향하는 곳을 얼른 살피고서는 온 조정이 그곳으로 쫓아갑니다. 전하의 마음이 돌아서면 온 조정이 들고 일어나 공격합니다. 그러니 동·서·남·북 은 전하의 마음이 두 서너 곳으로 갈라져 있어서 그런 것이지 조정에 어찌 동·서·남·북 이 있다는 말입니까. 말하자면 전하의 뜻이 한결같지 않아 조정이 붕당으로 갈라지고 쪼개지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하니 전하께서 그 마음을 한결같이 하는 것이 구천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1598년 12월 즈음에 대마도에서 사신을 보내 국교 재개를 요청했다. 이전부터 일본은 화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대마도 도주에게 국교 재개 요청 임무를 위임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논의했다. 전쟁 직후여서 조선에서는 일본을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 즉 함께 하늘을 머리 위에 두고 살 수 없는 원수로 여겼다. 그런데도 조정에 있는 이들이 모두 국교 재개에 반대한 것도 아니었고 논의도 치열했다.

 송제민은 이 소식을 듣고 분개했다. 일본과 다시 교류하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교류 재개를 논의하는 일 자체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본에 복수하는 일을 논해야지 일본과 다시 사이좋게 지낼 일을 논의할 때가 아니었다. 그는 복수를 해야한다고 주장했고 복수할 계책도 건의하였다. 만언(萬言)의 긴 상소문을 작성했다.

 송제민은 선조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일본에 대해 복수하기 위해서는 ‘지일(志一),’ 복수하려는 마음을 한결같이 해야한다고 했다.

 그런데 조정의 논의는 한데 뭉쳐지지 않고 갈라졌다. 안에서 뜻을 같이 해야 복수를 할 수 있는데 조정의 의견은 동서남북으로 갈라져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조정이 사방으로 갈라져 있다면서 조정의 신하들이 문제라고 했다.

 하지만 송제민은 달리 생각했다. 임금의 마음이 한결같지 않고 때에 따라 동서남북으로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정이 갈려 쪼개진 원인을 선조 탓으로 돌렸다.

 남들은 신하탓이라 하는데 송제민은 ‘너 때문이야.’라고 지목했다. 에둘러 말하지 않지도 않고.

 또 월나라 구천과 비교까지 했다. 구천은 오나라 부차와 싸워 회계(會稽)에서 진 후 복수를 다짐했다. 오나라로 직접 가서 부차의 시종꾼처럼 행동하였고, 월나라로 돌아서는 차근차근 복수 준비를 했다.

 쓸개를 옆에 두고 늘 쳐다보거나 맛보면서 스스로에게 ‘회계(會稽)의 치욕을 잊었단 말이냐?’고 말하면서 복수의 마음을 놓지 않았다.

 인구 수를 늘리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게 했다. 문종(文種)을 발탁하여 나라 정사를 믿고 맡겼고, 범려의 간언을 충실히 따랐다. 거의 10여 년에 걸쳐 복수 의지를 한결같이 다져 결국 이뤄냈다.

김종수가 정조 7년(1783)에 편찬한 『국조명신주의요략(國朝名臣奏議要略)』에 송제민의 상소문 일부가 들어 있다. 이미지: 한국학자료포털http://kostma.korea.ac.kr

 송제민은 복수를 향한 구천의 ‘한결같음’이야말로 복수 실천의 첫째 조건이라고 했다. 그런데 선조는 그렇지 못하였던 것이다.

 일본에 대해 복수해야하건만, 일본이 국교 재개를 요청했다고 얼른 논의하고, 마음도 일정하지 않아 보였다.

 선조는 즉위 직후 개혁을 강조했지만 실제 실천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던 듯하다. 개혁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던 이이조차 임금이 일할 뜻이 별로 없다고 여겼다.

 분당(分黨)으로 인해 신하들 사이에 갈등의 수준이 높아져갔다. 그러나 선조는 이이에 대해 소원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고 이이가 죽은 후 동인을 지지하는 태도로 입장을 바꾸었다. 분당에 대한 입장이나 태도는 일관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송제민은 선조가 때에 따라 변한다고 생각했기에 복수에 대해서도 ‘일관성’이 없을 것을 우려했다. 빙빙 돌려 말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게 더 적절하다고 판단했을 터이다.

 그래서 ‘동서남북은 전하의 마음에 있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임금의 뼈를 때렸다. 이 때 그의 나이는 50에 가까웠다. 20대 청년 시절의 담도 컸는데 그 담은 50대 중년으로 가면서 햇수만큼 더 커진 것이다.

 글을 관찰사에게 보이니 관찰사는 놀라 낯빛이 변했다. 꺼려지고 피해야 할 말들이 많다면서 받아주지 않았다.

 왜 안 그렇겠는가. 분당의 원인을 신하 탓으로 돌리는 터에 임금이 원인이라고 지목했으니, 임금의 분노를 살 것은 뻔했다. 관찰사가 두려워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송제민은 또 무모한 일을 했다.

 일본에 대한 복수는 나라 치욕을 씻어내고 백성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늘 백성들의 삶을 먼저 생각했기에 임금의 노여움 따위는 마음 쓰지 않았다. 관찰사가 보기에는 무모하고 ‘일 만드는 사람’이겠지만 송제민은 백성을 위해서 했다.

 제민(齊民)에서 다시 제민(濟民)으로

 사람들은 지도자들이 지녀야할 덕목으로 늘 ‘쓴 말’을 잘 받아들이는 자세를 꼽는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한결같다. 그러나 그 쓴 말을 하는 이도 있어야 한다. 특히 막강한 권력 앞에서도 쓴 말을 하여 ‘일 만드는’ 이가 있어야 한다.

 훌륭한 리더는 혼자 힘으로 되지 않는다. 리더를 둘러 싼 쓴 말 하는 이들이 다듬어주어야 한다. 송제민의 상소는 그것을 해낸다.

 몽오 김종수(夢梧 金鍾秀)는 송제민 문집인 『해광집』에 서문을 썼다. 그리고 ‘동서남북은 전하의 마음에 있다.’는 대목에서 크게 경탄했다. ‘왕이 된 자들이 영원히 귀감으로 삼아야 할 말’이라고 치켜세웠고 『국조명신주의(國朝名臣奏議)』 에 써 넣었다. 그것도 이 책의 첫 번째 항목인 군덕(君德)이라는 항목 속에. 이 책은 정조 때 쓰여졌다.

 탕평을 강조하며 나라를 다스렸던 할아버지 영조를 직접 보면서 성장했던 정조였으니 비록 임금을 꾸짖은 말일지라도 수용되었던 듯하다.

 선조 때에는 왕의 지척에 이르기는커녕 관찰사가 막아버려 호남 땅에서 나가지도 못했지만 정조 때에는 임금이 보는 책에 실렸다.

 그의 행장을 쓴 기정익(奇挺翼)은 송제민이 평소 마음 먹었던 것과 실제 행동이 일치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백성을 잘 살게 하겠다는 포부를 이름에 새겼고 실천했다. 이제는 이름을 ‘제민(濟民)’으로 되돌려 가져도 될 것이다.

 김기림 조선대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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