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츠비는 어떤 면에서 위대한가? 소설 ‘위대한 개츠비’(원제:The Great Gatsby) 독자에겐 주인공에 대한 이 수식어가 해묵은 논쟁 중 하나다. 원문에 ‘Great’ 를 쓴 출판사의 의도(작가 스콧 피츠제럴드는 생각이 달랐다는데)는 물론, 번역에 대한 ‘사실 충실성’(Factfulness)이 분명치 않아서일테다.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이 물욕과 정욕에 찌든 인물인데, 개츠비도 별반 다르지 않은 부류로 보인 탓이다. 그가 갑자기 부자가 된 과정에 부정한 기운이 감지되지만, 가난 때문에 붙잡지 못했던 애인을 되찾기 위해서라는 ‘사랑’으로 포장해 준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일 뿐이다.

 이는 소설 속 욕망에 이끌려 행동하는 인물들과 다른, 개츠비에게 헌사된 메타포로 이해된다. ‘위대함’의 범주를 위인에서 끌어내려 확장한 소설에 감사해야 할까.

 승패 떠나 감동 주는 정치 실종

 고르바초프와 데 클레르크. 20세기 가장 ‘위대한’ 패배자로 불리는 이들이다. 패배자에게 붙여진 ‘위대함’이 성공자의 그것보다 강렬하다.

 고르바초프(고르비)는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다. 당시 소련 경제는 엉망진창이었고, 미국(레이건 행정부)의 전략방위구상(SDI·일명 스타워즈)에 밀려 군비경쟁에서도 승산이 없음을 자각했다.

 글라스노스트(개방)·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천명한 그는 1988년 아프가니스탄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동유럽 위성국가들에게 소련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신호를 줬다. 이후 리투아니아를 필두로 에스토니아 등 소련 연방 탈퇴 선언이 이어져 15개국 중 11개국이 독립국가연합(CIS)을 출범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이 시기 고르비는 연방 중 제일 큰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에게 밀려났고, 소비에트 공화국 마지막 대통령으로 역사에서 퇴장했다. 자국에선 제국을 분열시킨 원흉이라 비난받지만, 서구에선 억압받는 민족을 해방한 구원자로 평가가 엇갈린다. 그리하여 그에게 붙은 수식어가 위대한 패배자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 대통령이었던 데 클레르크의 삶도 위대함의 반열에 서 있지만 패배자로 기록된다. ‘아파르트헤이트’(흑백 분리 차별)로 권력을 독식해 온 백인 정권의 대통령이었던 클레르크는 1990년대, 44년 동안 감옥살이 중이던 흑인 지도자 만델라와 협상해 민주적 선거에 따른 정권 이양의 길을 터줬다. 1994년 만델라가 대통령에 취임할 때 그 자신은 부통령으로 내려앉았다. 남아공의 오랜 상처였던 흑백 갈등을 진실 화해로 승화시키는 동반자 역할을 했다.

 예의 개츠비, 또는 고르비가 보여주듯 위대함은 승패에 달려 있지 않음을 알겠다.

 20세기 독일 통일 과정에서 주목받는 두 정치인도 위대함이란 수식어가 합당하다고 본다. 빌리 브란트와 헬무트 콜 총리다.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는 1960~70년대 불안한 정세 속 자민당과 연립정권을 수립해 동방정책(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자국 내에서도 반발이 심했지만, 1983년 기민당의 헬무트 콜은 이를 승계해 통일(1990년)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콜은 정파는 전혀 다르지만 브란트의 연장선에서 동독과 유화정책을 지속해 동유럽에서 공산권이 몰락하는 시기 독일 통일을 완성했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했던 비스마르크(19세기 독일 정치인)의 후손답다. “세상 안 될 것 같은 일도 대화를 통해 해낼 수 있고, 이게 정치의 묘미”라고 통찰했던 인물이다.

 ‘4·10총선 전쟁’ 차출 앞둔 유권자들

 이와 같은 ‘가능성의 예술’로서의 정치를 우리나라에선 기대하기 힘들 것 같아 자괴감이 든다. 예술은커녕 ‘가능성의 학살’ 수준이어서 참담하다. 특히 4·10 총선 국면에서 드러난 단면이 더 적나라하다.

 여야 간 대립은 죽고 죽이는 전쟁이 된 지 오래다. 전략이 상대방 ‘퇴출’이니 전술은 조롱하고 공격하는 ‘혐오’ 외 다른 게 있지 않다.

 각 당 내부 다툼도 이와 다르지 않다. 잠재적 경쟁자, 편을 갈라쳐 휘두른 칼날이 ‘전멸’ 수준이다.

 국민의힘은 대통령과 당 비상대책위원장 세력 간 권력 다툼이 노골적이다. 권력은 부자 간에도 나눠 갖지 못한다고 했던가. 현재와 미래 권력인 ‘친윤’과 ‘친한’ 세력은 문밖에 당도한 적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내부 총질을 멈추지 못한다.

 민주당 역시 당 대표 사당화 논란이 끊이질 않았으니 ‘비명횡사’ ‘친명횡재’라는 비아냥이 입에 착착 달라붙는 용어가 됐다.

 이처럼 정치인들이 변질시킨 거대한 전쟁이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결전’의 개념에 동의하든 안 하든 유권자들은 병사로 차출당할 처지에 놓였다.

 물론 자발적 참전 기운도 넘친다. 추종하는 정치인을 결사옹위하는 ‘팬덤’이 동력이다.

 반면 탈영 움직임도 만만찮다. 역시 ‘팬덤’과 무관치 않은데, 이를 작동시키는 기저인 ‘혐오’에 대한 반작용이다.

 거대한 격돌장 ‘4·10 총선’, 과연 누굴 위한 전쟁인가?

 채정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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