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공짜로 공부시켜준다’, ‘돈 많이 벌게 해준다’는 말로 어려운 형편에 있는 소녀들을 꼬드겨 현해탄 너머 일본 군수공장으로 끌고 가 강제노역 시킨 일본 기업들이 있다. 미쯔비시를 비롯한 전범기업들이다. 그들은 여전히 사실을 부인하며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을 외면하고 있다. 할머니들은 민족의 아픔을 오롯이 껴않은 채 하나 둘 늙음의 저편으로 사라져가고 계신다. 그네들의 아픔에 공감해 여고생들이 나섰다. 낯선 이들로 가득 찬 길 거리에 나아가 할머니들을 돕기 위한 기부 팔찌를 팔고, 무표정한 얼굴들의 시민들에게 미소 지으며 전범기업 제품 불매운동에 나서주실 것을 외쳤다. 지역의 많은 언론이 관심을 가져주었고 학생들은 용기백배 했다.



`대학 입시용’ 전락 다른 학생에 배타적

 그러던 어느 날 교무실로 동아리 학생 한 명이 찾아왔다. 낯빛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깜짝 놀라 무슨 일인가 물었더니 복도에서 다른 동아리 학생과 다퉜다는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위안부 할머니를 돕기 위한 활동을 예전부터 꾸준히 해오던 동아리가 있었고, 이 동아리도 올해 위안부 할머니를 돕기 위한 팔찌를 판매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하려고 했단다.

 그런데 다른 동아리가 근로정신대 할머니를 돕기 위한 팔찌를 판매하면서 활동이 겹쳐, 효과가 떨어진다는 불만이 제기된 것이었다.

 투덜거리는 학생들과 얘기를 나눴다. 동아리 학생들은 근로정신대 할머님들에 관련된 강연을 듣고 2주에 걸쳐 관련 역사적 사실을 공부하고 시민들에게 보일 피켓을 만들었다. 캠페인 하루 전날 그러한 노력들이 교내 많은 학생들에게 알려졌다. 일부 학생이 준비과정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길거리 캠페인에는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를 동아리에 전달했더니, 단호하게 안된다고 거절했다. 자신들이 이제껏 쏟아 부었던 노력이 얼마인데 준비과정에 참여하지 않은 학생들의 신청을 받아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숟가락만 얹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을 돌려보내고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위안부 할머니를 돕기 위한 동아리 학생들이나 근로정신대 할머니를 돕기 위한 동아리 학생들이나 약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공감을 실천하는 학생들이다. 그런데 그런 학생들마저도 다른 학생들이 자신의 활동을 따라하면 싫어하고 경계하며 스펙 쌓기에 무임승차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언론, 학부모, 교육계 종사자들은 동아리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주입한다. ‘학생부 전형 강화’ 속에서 교외 활동을 생기부에 적을 수 없으니 교내 활동 스펙 쌓기에 전념해야 한다. 특히 너희들이 하는 일제강점기 피해 할머니들을 돕기 위한 동아리 활동들은 생기부에 기록되고 ‘대학 입시에 매우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니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고 속삭인다. 그런 끊임없는 외침에 노출된 학생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활동의 목적(약자의 아픔에 공감하기)과 부수적 결과물(다양한 스펙 쌓기)을 바꿔서 생각하게 된다. 인성을 함양하기 위한 창의적 체험활동의 본말이 대학입시를 위한 수단으로 전도돼버린 것이다.



학생들에게 시간을 돌려줘야 할 때

 물론 학생들은 이를 인식하고 반성할 수 있는 힘이 있고 의지도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간이 없다. 8시부터 18시40분까지 이어지는 수업과 22시까지 이어지는 야간자습 속에서 과제에 치이고, 시험 준비에 치인 학생들에게 서로 모여 대화하며 자신들의 모습들을 비춰보고 반성해볼 수 있는 여유는 언감 생신 꿈도 못 꿀 호사인 것이다.

 교육감께 바란다. 학생들에게 시간을 돌려주는 정책을 확대해나가 주실 것을 바란다. 9시 등교, 야간 자율학습 폐지 등의 정책을 확대해나가 주시길 바란다. 스펙 쌓지 않으면 낙오한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학부모와 시민, 교사 등 많은 반대와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런 것에 좌절하여 포기한다면 결국 우리의 미래에는 아픔에 공감하기보다는 경쟁에 민감한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니 말이다.

김동혁<전교조 광주지부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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