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장현 광주시장의 ‘측근 실세’로 불렸던 김용구씨가 최근 비리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취임 2년을 넘어 임기 후반기에 접어든 윤 시장으로선 뼈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외척’에 ‘실세’로 불렸던 인사의 몰락인지라, 윤 시장이 “내탓이오”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윤 시장 취임 이후 김씨를 둘러싼 구설이 끊임없었고, 입달린 이들은 모두 ‘경계’를 주문했던 터. “주변의 쓴소리에 귀막았다가 예견된 참사를 못막았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운데, 윤 시장의 ‘우이독경’이 다시 도마에 오른다.

 측근 비리 수사에 광주시청이 압수수색까지 당하고보니 ‘시민시장’이라는 자존감에 입은 상처가 작지 않다. 민선6기 윤장현 시장 체제의 성패가 분수령에 선 분위기랄까. 반전이냐, 몰락이냐?를 결정짓는 ‘키’는 윤 시장 스스로 쥐고 있음이다.

 “터질 게 터진 셈이니 이참에 썩은 부위를 도려내고 재정비해야 한다”는 건, 반전을 바라는 이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한마디로 “변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위기를 반전의 계기로 삼으려면

 윤 시장이 주문받고 있는 ‘변화’는 무엇인가?

 주변 인사들과 공직자들 말을 종합해보니 “메시지가 불분명하다”, “내부(공무원)를 신뢰하지 않는 것같다”, “싫은 소리를 들으려하지 않는다” 등이 변화의 지점으로 꼽힌다.

 첫번째 지적은 “화법이 모호하고, 정책적 결단성이 부족하다”는 것인데, 업무 능력·자질 논란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두번째는 “시장이 자신들을 ‘식구’로 보지 않는 것같다”는 공무원들의 하소연이다. 어떤 정책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이들은 실무자들인데, 외부나 측근의 주문에 정책이 좌지우지된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분야에 대해선 (밖의) ○○○의 얘기를 들어라”는 식의 지시가 주는 자괴감인데, “공직사회 일하는 분위기를 해친다”는 푸념이 많다.

 세번째가 가장 뼈아픈 지적일 수 있다. “면전에서 쓴소리를 하면 표정이 달라진다. 그러면 더이상 얘기하기 곤란해진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듣고 싶은 소리만 듣겠다고 하면 쓴소리하는 사람을 내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렇게 언로(표현)가 막히면 왜곡된 정보에 갇힐 뿐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각하지만 생각중에서 표현되는 것은 너무나 적다.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정보가 실종된다. 우리는 사람들의 생각중에서 단지 그들이 표현하는 것만 알뿐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뇌’ 중에서>



▲언로가 닫히면 왜곡된 정보에 갇혀

 요즘으로 치면 지자체장이랄 수 있는 조선시대 ‘목민관’의 자세를 일깨운 다산 정약용으로부터 관련한 지혜를 배운다.

 정약용이 (황해도)곡산부사로 부임한 정조 21년(1797)때 일이다. 조정은 이 곳을 소요지역으로 규정하고, 주동자인 농민 이계심에 대해 체포령을 내려놓은 상황이었다. 조정 입장에서 ‘소요’라고 했지만, 백성들 입장에선 관아의 수탈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이었다. 전임 부사와 아전들이 군포를 다섯배 가량 부풀려 착취하자, 부당함을 호소하러 갔던 백성들이 되레 곤장을 맞고 쫓겨난 게 발단이었다. 이에 격분한 백성 1000여 명이 몰려들어 관군들을 막고 주동자인 이계심의 도망을 도왔는데, 이것이 조정이 규정한 ‘소요’사태의 전말이었다. 이후 종적이 묘연했던 이계심이 정약용의 부임 행차를 막아서며 출현했다. 그의 손에는 전후 사정을 담은 호소문이 들려 있었다.
아전들은 ‘죄인’인 그를 체포하자고 했지만, 다산의 처분은 달랐다.
“한 고을에 모름지기 너 같은 사람이 있어서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백성을 위해 그들의 어려움을 대신 호소했구나. 천금을 얻을 수 있을지언정 너같은 사람은 얻기 어렵다. 오늘 너를 무죄로 석방하겠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덕일>

 ‘언로’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이것이 리더의 자질에 따라 좌우된다는 걸 보여주는 일화다.



▲위험은 회피한다고 사라지지 않아

 타조는 위험에 처하면 모래에 머리를 묻어버리는 방식으로 회피한다고 한다. 보지 않는다고 위험이 사라질까? 현실을 직시해야 해결책이 생긴다.

 당 태종에겐 위징이라는 쓴소리꾼이 있었다. 때론 태종도 죽이고 싶다할 정도로 워낙 직간을 잘했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당 태종은 “충언하는 신하가 있으면 황제에게 복”이라며 위징의 간언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이같이 ‘열린 귀’로 이룬 치세가 ‘정관의치(貞觀之治)’라는 태평성대다.

채정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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