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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이의 문학생각]<2> 이광수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근대문학 ‘첫장’·친일문학가 ‘대명사’
문수현
기사 게재일 : 2019-05-22 06:05:01
▲ 춘원 이광수.

 춘원 이광수는 한국근대문학사 첫 장에 놓이는 작가다. 한국근대소설의 시발점으로 그의 대표작 ‘무정’을 꼽기에 그렇다.

 춘원은 작가로서 일찍부터 최고의 명성을 누렸다. ‘무정’이 1917년 1월 ‘매일신보’에 연재될 것이 예고됐을 때는 이미 육당 최남선의 ‘소년’ ‘청춘’ 등에 소설을 썼고 논객으로도 명성이 높은 때여서 독자들의 기대도 대단했다. 실제로 ‘무정’은 압도적 성공을 거둔다.

 그런 한편 이광수라는 이름은 친일논객·친일문학가의 대명사처럼 돼 있다. 1930년대 후반 이후 그의 친일 활동은 일관되었고 해방 직후에는 친일파·민족반역자라는 비난이 집중됐다.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의 친일 행위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민족애에 입각한 것이었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필자로서는 이광수에 대해 평가적 관점에서 감히 새로운 견해를 덧붙일 능력이 없음을 실토한다. 다만 여러 권위 있는 평자들이 엇갈린 견해를 내놓았다는 사실만은 독자여러분께 알려드리고자 한다.
 그를 둘러싼 논란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그의 생애에 관한 전기적 사실을 적어두자.
 
 ▲이광수의 일생과 ‘무정’, 그리고 동학
 
 춘원 이광수. 그는 189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가난한 농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1살에 콜레라로 부모를 1주일 간격으로 잃고 고아가 되었다. 동학과의 인연 덕분에 일진회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14살이던 1905년에 일본에 건너갔다. 16살에 2차로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 장로계) 중학부에 입학했다. 이 무렵 육당 최남선과 사귀었고, 졸업반에 재학 중이던 1909년에는 학교 교지에 일본어로 씌어진 ‘사랑인가’라는 제목의 단편을 발표했다.
이광수 무정.

 19세 되던 1910년에 메이지가쿠인 보통부를 졸업했다. 졸업 후 곧바로 귀국해서 고향 정주의 오산(五山) 중학 교원이 되고 결혼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교육에 전념하는 한편 시·소설·논설·희곡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활발한 문필활동을 펼침으로써 일약 조선의 젊은 명사로 떠올랐다. 1913년 22살 때에는 오산학교를 사임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기도 했다. 1915년 인촌 김성수의 후원으로 다시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들어갔고, 1917년 학업 중 장편 ‘무정’을 썼고, 1919년 2월 조선청년독립운동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해로 망명, 도산 안창호에 공명하고 임시 정부에 가담했다. 이때가 1921년 그의 나이 30세일 때다. 일본 유학생 허영숙과 재혼한 해이기도 하다.

 1922년에는 유명한 ‘민족개조론’을 썼고, 이듬해 동아일보에 소설을 쓰게 되고, 그 후 동아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부사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잇달아 ‘재생’ ‘단종애사’ ‘흙’ 등의 작품을 썼다. 1937년 ‘동우회’(흥사단) 사건으로 투옥되고, 보석 후 병상에 시달리는 정신적 위기의 절정에서 걸작 ‘사랑’ ‘무명’을 썼다.

 1939년 친일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됨으로써 소위 신체제문학에 협력하게 되고, 창씨개명을 하고, 1942년 ‘대동아작가대회’에 참가한 바 있으며, 해방 후 민족반역자 재판을 받게 되고, 6·25 때 북한에 의해 납치돼 그해 10월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춘원과 동학, 동학과 일진회
 
 이런 파란만장한 생애의 춘원의 문학을 논함에 있어 우리는 무엇보다 한 사람의 작가로 그를 대해야 하고, 그의 작품을 두고 그의 문학을 평가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앞에서 그의 대표작 ‘무정’은 한국근대소설의 시발점이라 했다. ‘무정’은 주제의 측면과 기법의 측면 양자에 걸쳐 한국소설의 역사를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만든 기념비적 문제작이다. 여기서 ‘기념비적’이라는 표현은 필자가 자의적으로 붙인 것이 아니라, 한국현대문학사 서술에서 ‘무정’의 지위를 규정함에 있어 어느 정도로는 굳어진 것이다.

 고 김윤식 교수는 ‘무정’에 대해 “시대를 그린 허구적 소설이지만 동시에 고아로 자라 교사에까지 이른 춘원의 빈틈없고 정직한 자서전이기도 하다. 그 자사전은 그대로가 당시 지식인 청년들의 자서전으로 연결되는 것이기도 했다”고 ‘무정’의 성공 요인을 분석했다. 춘원의 문학적 재능이 거기에 더해짐은 물론이다.

 11살에 고아가 된 춘원이 동학당 승이달에 이끌려 실제인물인 동학의 간부 박찬명 대령의 비서 겸 심부름꾼으로 몸을 의지한 것은 13살 때였다. ‘무정’에서 박진사의 원한과 그 딸의 원한을 제1주제로 내세운 작자의 의도는 이 박대령의 존재를 떠나서는 해명되지 못한다. ‘그의 자서전’에서 춘원은 박찬명 대령과 그의 딸 예옥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춘원과 동학, 동학과 일진회의 관계에 대해서도 짐작케 하는 부분이기에 길게 인용한다.

 이용구가 일진회를 끌고 선언서를 발표했을 때에 박대령은 분연히 반대하고 일어나서 싸우려다가 헌병대에 붙들려 거문도로 귀양을 가서 거기서 죽고, 한푼 유산도 없는 사모님은 예옥을 데리고 헤매다가 할 수 없이 운현이 녀석을 사위로 맞았으나 운현이는 헌병 보조원이 된 것을 큰 출세로나 알아서 읍내에서 첩치가(첩치가)를 하고 예옥이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벌써 이태가 넘는다고 한다. 예옥이와 살림을 하는 동안에도 운현이는 나를 문제로 삼아가지고는 예옥을 볶고, 술이나 취한 때에는 때리기까지도 여러 번 하여서 풍파가 끊인 날이 없었다고 하는데, 어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예옥이는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우는 얼굴에서 나는 옛날 예옥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의 자서전’ 334쪽)
이광수 육필원고.

 위 인용문에 나온 이용구는 동학의 수청대령으로 제3대 교주 손병희 다음가는 존재였으나, 손병희가 일본에 있는 동안 친일 분자의 선봉이 되어 동학을 친일단체 일진회에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그런 이용구와 대항한 위대함과 그 말로는 어린 춘원의 가슴에 엄청난 이상과 상처를 남겼고, 그 흔적은 장편 ‘무정’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무정’의 문학사적 의의
 
 ‘무정’이 최초의 연애 소설이라는 점도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이유 중 하나다. 구가족 제도의 표상으로 그려지고 있는 박영채와 자유연애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형식과 김선형 사이의 삼각관계는 당대 사회의 풍속적 기능을 예리하게 포착한 설정이다.

 육당은 ‘무정’의 첫머리에 이런 헌사를 붙였다.

 “…혼자매 크지 못하도다. 그러나 비인 들에 부르짖는 소리는 본디 떼지어 하는 것 아니로다. 벗부르는 맹꽁이 소리는 하나가 비롯하여 온 벌이 울리는 것이로다. …이제 그가 넓직한 얼굴을 우리 앞에 내어 놓고 동트는 기별을 울리기 비롯하였도다. ‘무정’은 그 첫 소리로다. 둥둥거리는 이 울림이야말로 우리의 마음의 움이 눈트는 기별이며, 생각의 살림이 신날 꼬는 기별이며, 오래오래 먼지 앉을 박달의 글월이 새 빛을 내며, 새 치부장을 넘김이로다. …외배란 북은 때리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울며, 한번 울기 비롯하면 다시 그칠 줄 모름이랴…”(‘무정’ 초판 서문)

 문학평론가 김윤식 교수는 육당의 이 헌사는 과장이 아니라 가장 정확한 감각이었다고 강조한다. 작가에게 사심 없는 진실이었기에 ‘무정’은 누구에 대해서도 감동을 주는 진실일 수 있었던 것이고, ‘무정’의 시대는 순결성·정결성이 생명감 자체로 인식되는 그런 시대였다는 것이다.

 한편 육당의 헌사에서 주목할 또 다른 부분은 육당의 문장 그 자체다. 한국 근대문장을 건설한 공적은 육당의 신문장건립운동에 돌아가는데, 육당의 그런 실험을 본받아 그 뒤를 이은 사람이 바로 춘원이다. 실제로 ‘무정’을 고비로 비로소 소설에서 근대적 문체가 이룩된다.

 “허허 그가 유명한 미인이라네. 자네 힘에 웬걸 되겠나마는 잘 얼려 보게, 그러면 또 보세” 하고 대팻밥 벙거지를 벗어 활활부채를 하며 교동골목으로 내려간다. 형식은 이때껏 그의 너무 방탕함을 허물하더니 오늘은 도리어 그 파탈하고 쾌활함이 부러운 듯하다. (‘무정’ 첫 회의 마지막 부분)
이광수. 강현화 그림.

 ‘무정’에서 춘원은 대명사 ‘그’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 사용법이었다. 영어에서의 She에 해당되는 선형을 “그가 유명한 미인이라데”라고 쓴 것이다. 명치기 일본어도 여자 3인칭 단수에 알맞은 대명사가 없어 ‘彼女’(가노죠)라는 말을 고안해 계속 사용하던 때였다.

 과거형, 현재형, 완료형 등 시제를 완성한 일도 그의 공적이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긴 호흡의 일상어를 구축한 점도 강조돼야 한다.
 
 ▲“소위 신체제 문학에 가담했다”는 논란
 
 한편, 춘원을 말함에 있어 빠트릴 수 없는 부분이 친일행각 및 친일문학에 관한 점이다. 문학평론가 김현 교수는 이와 관련해 “이광수에게는 역사 의식이 없었다”면서 “그의 역사 의식의 결여는 자기 기만의 결과다. 그는 역사 의식의 결여를 은폐하기 위하여 사회적 윤리와 개인적 윤리를 혼동시킨다”라고 비판했다.

 이와 달리 김윤식 교수는 춘원을 옹호하는 입장에 섰다.
 “소위 신체제 문학에 이광수가 가담한 것, 그 반민족적 행위가 있다. 물론 이 문제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이 문제도 전향의 논리로 파악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리라.”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는데, 숙고해 볼 가치가 있는 지적이다.

 “한국적 에토스에서 전향 문제가 윤리의 치명상인 배신으로 간주된다는 것 자체는 재고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이 문제도 이광수의 모랄의 문제로 살필 수가 있을 것이다… 이광수, 그리고 한국 문학은 아무나 두들길 수 있는 동네북일 수 없다. 동시에 누구라도 두들겨 봐야 될 한국 근대화 속, 그 종로 네거리에 서 있는 인경인 것이다.”

 김 교수는 덧붙여 이광수의 문학(한국문학 전반에도 적용된다)을 특정 사조(思潮)로 도식화시키는 병폐, 예를 들어 ‘무정’의 대단원 부분에서의 이형식의 설교를 계몽주의라 하는 이들은 소설의 구성, 전개 및 종결의 의미를 재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는 지적도 하고 있다.

 참고로, 춘원의 생애와 문학에 관한 심도 있는 저술로는 김윤식 교수의 ‘이광수와 그의 시대[개정·증보]’(솔출판사, 1999)가 독보적이다.

 [참고문헌]
 한국근대문학의 이해(김윤식), 일지사, 1973
 이광수와 그의 시대[개정·증보](김윤식), 솔출판사, 1999
 한국현대문학사[수정판](김윤식),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8
 약전으로 읽는 문학사1-해방 전(근대문학 100년 연구총서 편찬위원회), 소명출판, 2008

글=문수현<전북교육신문 기자>/그림=강현화
 
 ※글쓴이 문수현은 전북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습니다. 현재 전북교육신문 기자로 활동중입니다. 아울러 이 코너는 전북교육신문에도 함께 실립니다.

 ※그린이 강현화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지금은 시골살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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