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 아동 인권침해 불구
정부 아무런 역할 하지 않아
피해 사실 숨겨야 할 ‘꼬리표’로
“이제라도 지원책 마련해야”

▲ 13일 광주시의회 1층 시민소통실에서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여자근로정신대 지원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을 연 가운데, 기자회견에 참석한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가 일본 정부에 사죄를 촉구하고 있다.
“나랑 못 살겠다고 집 나가서 10년 만에 돌아온 남편이 ‘내가 바람 좀 핀 것이 뭔 죄냐’고 그랬다. 그래도 말 한 마디 못하고 살아야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1931년생, 1944년 5월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 동원)의 가슴 아픈 사연이다.

강제동원 피해 유형은 정말 많지만 ‘여자근로정신대’는 상대적으로 사회적 관심이 덜했고,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찾아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는 결코 피해자들의 탓이 아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은 13일 광주시의회 1층 시민소통실에서 ‘근로정신대 피해자 지원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통해 “한일 양국 모두 근로정신대 문제를 방기했다”고 지적했다.

▲“한일 양국 근로정신대 문제 방기”

여자근로정신대는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정부와 기업들이 노동력 부족을 충당하기 위해 초등학교에 재학 중이거나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10대 초중반의 여학생, 미성년 여성을 한반도 내와 일본의 군수공장 등으로 동원해 강요한 사건을 말한다.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고통을 겪은 1차적 책임은 일본정부에 있지만, 한국정부 역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나 역사교육이 이뤄지지 않다보니 국민들도 일본군 ‘위안부’와 ‘근로정신대’를 구분해 이해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민모임은 “여자근로정신대 사건에 대한 학술 연구물도 손에 꼽을 정도다”며 “한국정부 차원에서 최초 직권조사보고서와 피해자 구술집이 나온 것도 2008년이었다”고 설명했다.

미성년 아동에 대한 인권 침해문제이자 전시 여성 인권 관점에서 적극 다뤄졌어야 할 근로정신대 문제가 외교 의제로 설정되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다.

가부정적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로의 오해와 국가의 무관심은 피해자들을 더욱 움추리게 만들었다.

시민모임은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경우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소외를 받는 등 홀로 궁핍한 생활을 견뎌 와야 했다”며 “피해자라는 사실 자체가 ‘꼬리표’가 돼 뒷골목을 전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실제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김성주 할머니(1929년생)는 “행여 일본에 다녀온 것을 누가 알까봐 쉬쉬했다. 꼭 뒤에서 손가락질 하는 것만 같아서 내 평생 큰 길 한 번 다니지 못하고 뒷골목으로만 다녔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일본의 사죄는 물론 한국 사회에서도 위로 받지 못한 피해자들은 해방 후 74년이 지나도록 누구에게 마음 껏 피해 사실을 털어놓지도 못하고 홀로 모든 고통과 아픔을 감내해야만 했던 것.

▲2012년 광주서 첫 피해자 지원 조례

피해자들의 위한 정부 차원의 지원 제도가 있을리 만무한 상황에서 지난 2012년 광주에서 처음으로 근로정신대 피해자 지원 조례가 만들어졌다.

생활보조비 월 30만 원을 지원하는 것이 골자로, 광주 조례를 시작으로 경기도, 전남도, 서울시, 인천시, 전북도 등도 비슷한 조례를 만들어 피해자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양금덕 할머니는 2012년 조례 제정 당시 “자식보다 낫고, 형제간보다 낫다. 이제야 나를 인정해 주는 것 같아 너무 행복하다”고 기뻐했다.

하지만 지자체 조례만으론 많은 한계가 있는 게 사실이다.

“마땅히 정부가 나서야 할 피해자들의 지원을 지방정부에게만 맡겨 놔선 안 된다”는 차원에서도 정부 차원의 지원법을 고민할 때가 됐다는 지적이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13일 광주시의회 1층 시민소통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자근로정신대 지원법 제정을 촉구했다.

시민모임 안영숙 대표는 “광주에서 조례가 만들어진 뒤로 타 지역 피해자들로부터 ‘왜 우리는 지원을 받지 못하냐’는 안타까운 전화가 많이 왔다”고 말했다.

이에 시민모임은 “이제라도 지원법 제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부 차원 실태조사 한번도 안해”

바른미래당 김동철 국회의원이 지난 2월 대표 발의한 ‘일제강점기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에 대한 보호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과 관련해 정부와 국회 차원의 적극적인 제정 노력을 촉구하고 나선 것.

조례가 아닌 지원법을 요구하는 건 국가가 나서 피해자들의 생활안정을 돕는 것은 물론 피해자들에 대한 실태조사, 피해자 구술 등 역사교육의 필요성도 큰 이유다.

시민모임 이국언 대표는 “여자근로정신대는 전시 여성 인권문제이면서도 아직까지 정부차원의 실태조사가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며 “피해자들이 현재 어떤 환경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물론 여자근로정신대 사건의 진상규명 노력도 시급하다”고 밝혔다.

또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에 대한 구술 작업도 시급하다”고 말했다.

정부의 실태조사가 없었다보니 생존해 있는 근로정신대 피해자의 숫자는 정확히 파악된 게 없다.

근로정신대 피해자 지원 조례가 제정됐을 당시 각 광역지자체의 수혜 대상을 보면 광주시가 18명(2012년)이었고, 경기도는 34명(2012년), 전남도는 40명(2013년), 서울시는 27명(2013년), 인천시는 7명(2015년), 전북도는 20명(2016년) 등으로 총 146명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정확한 것은 아니고, 대신 ‘국외 강제동원 생존자 의료지원금 지급 현황’을 토대로 생존자가 어느 정도 될 것이라는 추정만 가능한 상황이다.

국외 강제동원 생존자 의료지원금 현황.<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지원법 만들어 피해자들 증언 기록해야”

시민모임이 파악한 2019년 의료지원금(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지원위원회에서 피해자로 결정된 사람 대상 매년 2월 80만 원 씩 지급) 지급 현황을 보면 올해는 전국적으로 4034명이 지원금을 수급했는데, 이중 여성 생존자는 167명이다. 여기에는 노무동원 등 다른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있을 수 있지만 일단 살아있는 근로정신대 피해자가 167명이 채 되지 않는다는 건 알 수 있다.

안영숙 대표는 “소송에 참여한 심선애·이영숙 할머니 등 올해만 근로정신대 피해자 3분이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이국언 대표는 “역사는 일종의 기억투쟁이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드시 되풀이 된다”며 “지원법을 제정해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역사교과서, 교육과정에도 반영해 제대로 된 역사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는 일본의 역사왜곡 대응에 있어서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강경남 기자 kkn@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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