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간판장이’ 박태규

 손이 잘 풀리지 않았다. 1년 6개월 만의 작업이다. 붓질이 엉키고, 선들이 자꾸 겹쳤다. 간판 그림은 실제와 같은 사실감이 핵심이다. 사진 같은 그림, 경력 18년의 간판장이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3일째 되던 날부터 속도가 붙었다. 덧칠이 안정되고, 송두율의 얼굴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경계의 그늘들이 조금씩 드러났다. 그는 안도했다.

 박태규(46), 그는 화가다. 그리는 행위를 통해 세상을 본다. 간판을 그리는 일도 다르지 않다. 세상과의 대화다. 감독의 질문이 간판장이의 ‘말 건넴’으로 변한다. 그에게 간판은 또 하나의 영화다. 1992년 광주극장에서 간판 일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늘 그랬다. 이미 실사출력 포스터가 대세가 된 지 오래인 시대, 그는 영화 간판을 통해 지나온 삶을 보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읽는다.

 수 없이 많은 간판을 그렸다. 요즘의 작업은 조금 특별하다. 언제 간판이 영영 사라질지 알 수 없다. 광주극장이 문을 닫는다면 광주에서 영화 간판을 거는 극장은 아주 없어질 것이다. 역시 그가 간판을 그릴 공간도 사라진다. 자본의 공습은 빈틈이 없고, 그는 늘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으로 그린다.

 이번 작업은 홍형숙 감독의 ‘경계도시2’다. 그리면서 마음이 무겁다. 영화를 통해 던지는 감독의 질문이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는 탓이다. 그 또한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다. 2003년 송두율 교수의 귀향을 기억한다. 그 때 이 나라가 어떻게 갈라졌고, 한 개인의 삶을 얼마나 철저하게 짓밟았는지 안다. 영화는 그 1년을 그리고 있다. 송두율은 개인이지만 집단이었고, 나라는 광기가 유령처럼 몰려다니는 공간이 됐다.

 

 ‘걸개그림’을 통해 세상을 보다

 처음엔 이렇게 긴 세월일지 몰랐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의 간판 스승이었던 광주극장 홍용만 부장도 그가 몇 달 그리다 떠날 것으로 생각했다. 스승은 꼼꼼하게 가르쳐주지 않았고, 그는 늘 어깨 너머로 배웠다. 삶은 예측과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고, 그는 지금 마지막 남은 간판장이가 됐다.

 미대에 다닐 때부터 큰 그림을 그렸다. 시대가 수상했다. 그는 그림을 통해 시대에 복무하는 방법을 찾았고, 그것이 걸개그림이었다. 집회현장에 걸리는 그림들은 전체적으로 무겁고 거칠었다. 반면 얼굴은 세밀하게 그려진다. 그 투박한 세밀함 속에서 강렬한 힘을 보여주는 게 걸개그림이다. 일반의 그림과는 표현 방법이 다르다.

 대학을 졸업하고, 제대로 그려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영화간판 일은 걸개그림과 닮아있다. 그림도 배우고, 생계도 해결할 수 있으니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는 제 발로 광주극장을 찾았다. 그 때가 1992년이다. 스승은 말을 아꼈다. 그는 기껏 글씨나 썼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밑그림을 그렸다. 얼굴을 그리는 게 허락된 것은 입사하고 5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2000년대 초반, 영화 ‘맨인블랙’으로 기억한다. 그 영화부터 극장의 얼굴이었던 간판이 실사출력으로 바뀌었다. 다들 떠나고 나만 남았다. 참 힘들게 배웠다. 극장 간판은 유화 물감이 아닌 페인트를 쓴다. 휘발성이 강해 금방 마르기 때문에 덧칠이 어렵다. 얼굴 그림은 금방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쩌다 보니 그는 간판 그림의 마지막 세대가 됐다. 간판 그림은 세상에서 거의 사라졌고, 그 역시 작업할 기회가 많지 않다. 많으면 1년에 한 번, 보수가 따로 정해져 있지도 않다. 겨우 재료비에 의지한다. 거래의 개념이 아닌 의미의 공유인 셈이다. 그래서 늘 마지막이란 생각이 든다. ‘송환’을 그릴 때도 그랬고, ‘우리 학교’ 역시 다르지 않았다.

 

 “간판이 내 그림이고, 내 그림이 간판”

 지금은 다르지만, 어쨌거나 영화 간판은 예술의 영역이기보다 상업적 성향이 짙었다.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그림이 간판이었지만 내적 고민이 깊었다. 그는 화가다. 간판을 자신의 그림으로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영화 간판의 시대가 진 뒤 그는 환경에 관심을 가졌다. 지금은 ‘자운영 아트 미술학교’를 아내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미술을 매개로 한 환경수업을 한다. 강을 그리고, 강과 마을의 관계를 그리고, 강물이 사람 속으로 스미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담양습지나 광주천, 반남고분, 몽탄. 영산강의 물길이 그와 아이들 사이에 흐른다. 공부방이나 지역아동센터를 다니며 미술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자기 작업을 계속했다.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싶어도 돌아보면 늘 거기 영화간판이 있었다. “정통 미술과 간판 사이에서 정말 많이 헤맸다. 질문은 늘 무엇이 내 그림인가였다. 나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어느 날 알게 됐다. 간판 속에 내가 있고, 나 속에 간판이 있었다. 간판이 내 그림이라는 걸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고, 작업도 한결 수월해졌다.”

 2002년 그는 화가로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제목은 ‘마지막 영화 간판장이’였다. 그렇게 영화 간판은 소멸하면서 그의 그림으로 되살아났다. 2002년 광주비엔날레 때다. 묘한 영화 포스터가 상무대 영창과 광주 곳곳에 걸렸다. 제목은 ‘광주탈출’, 사람들은 “저런 영화가 있어나?”하며 궁금해 했다. 필름은 없었다. 그러나 영화는 광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었다. 그 마음을 읽어낸 박태규가 영화간판 기법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다.

 ‘마지막 영화 간판장이-박태규전’에서는 간판에 대한 미술적 시도의 품이 더 넓어졌다. 스스로의 삶뿐만이 아닌 이 땅에 영화 간판장이로 살다간 모든 사람들에 대한 헌사가 거기 있었다. 춘사 나운규의 ‘풍운아’부터 임순례의 ‘와이키키 브라더스’까지 한국영화사와 근현대사를 돌아볼 수 간판들이 전시장에 걸렸다.

 

 송두율, 그 ‘경계’의 얼굴

 영화 간판 하나는 극장의 역사다. 한 번 그리고 버리는 물건이 아니다. 먼저 걸린 영화 위에 덧칠해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어떤 간판 속에는 그 극장에서 개봉했던 모든 영화들이 화석처럼 잠들어 있다. 지금은 늘 마지막일 수 있어서 덧칠할 간판을 선택하는 것부터 고민이다. ‘경계도시2’를 그리기 위해 그는 ‘송환’과 ‘우리 학교’ 중 하나를 버려야 했다. 그는 더 오래됐지만 애착이 가는 ‘송환’을 남겼다.

 ‘경계도시2’는 ‘우리 학교’ 위에 덧칠됐다. 밑그림을 그릴 때 그는 저 밑바닥에서 무언인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송두율의 무게는 작은 것이 아니다. 이 나라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준 사람이 2003년의 송두율이었다. ‘경계도시2’는 경계인의 철학을 지키고자 했던 그의 고뇌를 담고 있다. 그 고뇌를 대한민국 사회가 어떻게 파괴하고, 철저하게 망가트렸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개인에 대한 집단의 폭력은 다른 어떤 것보다 강하고 무섭다.

 “원래는 영화사에서 송 교수의 뒷모습이 담긴 포스터만 그려 주기를 바랐다. 영화 간판에 송두율의 얼굴을 직접 담는 것이 여전히 부담스러운 시간이다. 내 독단으로 얼굴을 그려 넣었다. 송두율의 얼굴에 대한민국의 이분법적 사고가 전부 들어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이 나라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할 것을 강요했다. 그에겐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권고였다. 그의 얼굴을 통해 집단의 폭력을 담고 싶었다.”

 그랬다. 이제 영화 간판은 소멸의 길에 들었고, 역으로 소모품이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그리는 자의 의도를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는 간판 속에 ‘숨은그림찾기’처럼 원래 포스터에 없는 무언가를 그려 넣었다. 작가의 생각 반영이며 참여다. 혹시 광주극장에 간다면 ‘경계도시2’에 숨은 또 다른 그림을 찾아보기를 권고한다. 거기 박태규가 있다.

 글=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사진=임문철 기자 35mm@gjdream.com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