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전남도청 변천과정

▲ 1930년대 전남도청의 모습.

 현재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자리에 전남도청이 둥지를 틀기 시작한 것은 1910년부터다. 처음 얼마동안 전남도청은 오늘날의 국세청에 해당하는 기관인 광주재무감독국이 지은 청사를 인수받아 사용했다. 건물은 단층의 목조건물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전 초기부터 도청을 신축해야 한다는 의견이 거듭 제기됐던 것 같다. 하지만 1920년대까지 도청의 신축계획은 답보상태를 면치 못했다. 재정난때문이었다. 아무튼 20년대 광주시내 일원에 새로운 학교들이 속속 설립되고 기존의 금융기관들도 벽돌 건물로 개축을 하면서 단층의 목조건물이던 도청의 모습은 더욱 초라하게 비쳐졌다.

 

목조건물에서 탈피하기 위한 과정

 도청의 신축 문제가 다시 거론된 것은 1927년이다. 신축은 여러 방안이 거론됐는데 그 중 하나가 재무감독국 시절부터 사용해온 목조건물 뒤쪽에 새로 벽돌 건물을 짓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존의 목조건물은 당시 무등극장 일대에 있던 광주군청을 이곳으로 옮겨와 사용하는 방안이 검토됐다. 하지만 이 방안도 즉시 실현되지 못했고 신축은 1929년 도청 신축설계도를 완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런데 도청 본관의 설계와 관련, 일각에서는 강원도 삼척 출신의 건축가 김순하가 그 설계를 맡았다고 주장한다. 김순하가 본관 신축 당시에 전남도 토목과에 근무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도청 설계를 주도했는가는 의문이다. 오히려 그보다 상급자였던 야마다(山田)란 사람이 설계를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고, 실제로 당시 매일신보 1929년 6월 21일자 기사에도 그런 내용을 전하고 있다.

 여하튼 도청은 1929년 12월 완공을 보게 됐다. 건물은 기존 목조건물에서 몇 십 걸음 뒤로 물러나 자리를 잡았고 건축자재는 나무에서 붉은 벽돌로 바뀌었다. 그리고 새로운 건물이 그 앞을 지나는 도로에서 물러나면서 생긴 공터는 일종의 작은 광장 역할을 했고 여기에 지금도 도청 앞을 지키는 은행나무가 식재됐다.

 

계속된 증축, ‘王’ 형태로 건물군 완성

 그런데 본관 건물을 신축 1년도 지나지 않아 도청 내부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증축문제가 다시 제기됐다. 이때 도청 증축안은 본관을 중심으로 좌우측과 뒤편에 부속건물을 지어 전체평면이 옆으로 누운 ‘日’자 형태를 이루는 것으로 계획했다.

 이 증축안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대신에 1928년 본관 오른쪽에 건물을 신축했고 이를 처음에는 회의실로 사용했다. 그 후 이곳에 상공회의소 등이 이 건물에 입주하면서 건물은 회의실보다는 상공회의소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됐다. 그리고 도청 증축문제가 한창 거론되던 31년 본관 증축을 대신해 그 왼쪽에 또 다른 건물을 신축했는데 이 건물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고 이것이 흔히 우리에게 ‘구 전남도회의실’로 알려진 건물이다.

 도청 증축은 31년으로 끝나지 않았다. 1940년 도청은 다시 대대적인 증축공사를 했다. 이때 본관 건물 뒤편으로 두 겹으로 ‘一’자형 건물들을 덧대어 짓고 이들 건물을 중앙 복도 로 연결해 ‘王’자 형태의 건물군을 구성하게 됐다.

 

도청 신축과 함께 찾아온 금남로 탄생

 한편, 이런 변화와 때를 같이해 도청 앞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도청 증축이 아직 손도 대지 못한 상태였지만 1925년 도청 앞에서 길게 서쪽으로 내질러 대인동의 광주역(구역을 말한다)에서 광주대교 사이를 잇는 도로(현 구성로)와 교차하는 금남로 개설공사가 착수됐다. 그런데 금남로 개설은 1가부터 시작됐을 것이란 추측과 달리 사실은 4가부터 먼저 시작됐다. 이처럼 도로개설공사가 처음이나 마지막 부분이 아닌, 중간 부분부터 시작된 것은 당시 도청 앞에서 3가 사이에 주요한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지금의 도청 앞 광장에 해당되는 부분에는 일본군 헌병대본부가 주둔 중이었다. 또 그 아래쪽인 전일빌딩 자리에는 서석초교의 전신인 광주공립보통학교(광주보교)가 있었다. 이 학교는 1896년 개교 당시에는 광주공원에 있다가 1907년부터 금남로1가인 전일빌딩 일대로 이전해 운영 중이었다. 그리고 전일빌딩에서 아래쪽으로 내려가 지금의 가톨릭센터 등이 들어선 3가 일대엔 법원이 진을 치고 있었다. 법원은 처음 개설 당시인 1908년에는 도청 맞은편에 있다가 그해에 무등극장 일대로 이전했고, 여기서 1911년까지 머물다가 금남로3가의 현 가톨릭센터 일대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금남로 개설을 위해서는 이들 건물을 이전하거나 그 부지의 상당부분을 수용해야 했는데 이 일이 만만치 않아 금남로는 1927년에 가서야 겨우 지금과 같은 모양을 갖출 수 있었다. 여하튼 이러한 금남로 개설로 헌병대본부는 도청 맞은편에서 YMCA 쪽으로 이전했고, 광주보교는 1927년 서석동에 새 교정을 마련해 이전했으며, 법원 역시 그 부지의 일부를 금남로에 내놓는 동시에 30년에는 기존의 목조건물을 헐고 같은 자리에 새로 벽돌 건물을 신축했다. 그리고 이러한 도청과 그 앞의 금남로 모습은 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큰 변화 없이 지속됐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 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