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용택 감독의 영화<감자 심포니〉

▲ 영화 <감자 심포니〉(2009)의 한 장면. 강원도 영월 전설의 주먹 백이(이규회)다.
(2018년 2월28일자에 이어서 씁니다)
‘불편한 기억’은 고등학교 때 백이(이규회)를 대장으로 한 광산파 넷이 곡괭이파 진한에게 두들겨 맞고 무릎을 꿇었던 일을 말한다. 영화에서는 이 일을 뚜렷하게 보여 주지 않는다. 다만 진한이 약속을 어기고 떼거지로 몰려와 이 넷을 무릎 꿇렸던 일이라고만, 그도 영화를 다 봐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주인공 백이, 절벽(전용택), 혁이(이석호), 이노끼(김병춘)는 서른아홉인데도 20년 전 고등학교 때 당했던 ‘굴욕’에 사로잡혀 있다. 그 기억은 ‘상처로서의 기억’이고, ‘트라우마’가 되어 있다. 기억이란 게 원래 그렇다. 잊히지 않는 기억이란 대체로 행복했던, 충만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라기보다는 상처로서의 기억일 때가 많다. 그 상처는 생채기일 수 있고, 서운함, 서러움, 안타까움, 억울함,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되돌릴 수 없는 후회 같은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절벽이 백이한테 말한다.

“처음으로 기가 콱 막히던 그런 경험 기억나나? 며칠 지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결국 평생 그 상태로 살게 되더라. 난 그게 그때 진한이 새끼한테 무릎 꿇었을 때여.”

넷은 모였다 하면 그때 일을 떠올린다. 혁이는 “아이 씨팔 그때 죽자 사자 한번 붙었어야 하는 건데……” 하면서 후회한다. 사실 진한이 영월에 없다면 이렇게 괴롭지도 않을 것이다. 이들이 20년 전 굴욕에 사로잡혀 찌질하게 살고 있는 반면 진한은 고등학교에서 잘렸는데도 그 학교에 장학금을 내고, 9시 뉴스에 미담으로 나오고, 조선일보에도 한 면을 통 털어 인터뷰가 나온다. 영월 건달 진한이 잘 나가면 잘 나갈수록 그때 그날의 상처는 더 커지고 곪아터지기 직전이다. 그들은 그 상처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루도 더 살 수가 없다.
백이, 혁이, 이노끼는 진한을 찾아간다. 백이가 진한에게 전화로 “빚 갚으러 왔다, 한번 치자.” 한다. 진한은 그날 ‘혼자’ 나온다. 백이는 진한을 때려눕히지만 무릎을 꿇리지는 않는다. 친구가 할 짓이 아니라면서. 그 뒤 진한은 건달 짓을 그만두고 래프팅 사업을 한다.

광산파 동무들 가운데 가장 상처가 깊은 이는 절벽이었지만 그는 그날 결투에 가지 않고 길을 떠난다. 그 뒤 소설가가 되어 이 이야기를 이렇게 끝맺는다.

“걷고 걷다 보면 수많은 생각이 오고갑니다. 그리고 이내 상념에 젖어들면서 기억이 투명하게 떠오르는 시간이 찾아옵니다. 무엇이 진실이었고 무엇이 변명이었는지가 명확히 보이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난 처음으로 강둑에서 소주를 들이키던 그 특별한 날의 기억을 보았습니다. 그날 아버지는 제 미술도구 일체를 아궁이 속에 던져 버리셨습니다. 지금도 장작불 앞에 앉으면 그때 타들어 가던 유화물감 냄새가 느껴지는 듯합니다. 타다 만 장작같이 오랫동안 마음 한편에 남아 있던 화가의 꿈을 완전히 쓸어냈습니다. (……) 저는 사람은 변한다는 말도 믿게 되었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도 여전히 믿습니다.”

〈감자 심포니〉의 4악장 주제가 “필요한 것은 모두 내 안에 있다”인 것처럼 절벽의 20년 전 기억, 상처로서의 기억을 치유할 힘 또한 자기 안에 있었던 것이다. 걷다 보면 기억이 투명해지고, 무엇이 변명이고 무엇이 진실이었는지 명확히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도, 변한다는 말도 여전히 믿는다고 한다. 물론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오래된 상처에, ‘그 불편한 기억’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만, 나는 아직 속이 없어 그런지 사람이 변한다는 말을 웬만해서는 믿지 않는 편이다.
김찬곤

광주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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