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박노해 시인은 1957년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 기각리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박기평이다. 부모님이 ‘평화의 기틀’이 되라고 지어 준 이름이다. 아버지 박정묵은 고흥군 동강면 남로당 당원이었으며, 1948년 여순사건 때는 빨치산이 되어 싸운 혁명가이다. 아버지는 ‘빨갱이’였고, 그가 여섯 살 때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 뒤 삼남매는 어머니가 행상을 하며 키운다. 박노해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사상을 이해하고 무덤을 찾는다. 떼가 무너져 내린 초라한 무덤 앞에 담배와 소주를 놓고 아버지에게 용서를 빈다. 그리고 그 또한 아버지를 따라 이 땅의 혁명가가 된다.

 박노해는 함평에서 나고, 고흥 동강초등학교를 다닌다. 중학교는 벌교중학교를 다닌다. 그리고 1977년 서울 선린상고(지금의 선린인터넷고) 야간부를 졸업한다. 태어난 곳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지역이 모두 다르다. 선린상고를 졸업한 뒤 삼원철강, 군자동 섬유공장, 청량리 공사판, 성수동 마찌꼬바, 안남운수에서 버스 운전사로 일한다. 그는 이때 서울노동자연합(서노련)에서 활동한다. 같이 일한 사람으로는 심상정, 김문수, 유시민, 백태웅, 문성현, 이옥순이 있고, 그가 버스 운전을 배우게 된 것은 김문수의 권유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느 글에서 버스 운전사로 일할 때 승객 얼굴이 버스 토큰(가운데가 동그랗게 구멍이 뚫린 동전)으로 보였다고 한다. 이때 그는 동료들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 준다. 어쩌면 그의 글쓰기와 노동시는 연애편지 대필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1984년 박노해 이름으로 ‘노동의 새벽’이 나온다. 필명 박노해는 ‘박해 받는 노동자의 해방’을 뜻한다. 동료들은 박노해가 누군 줄 몰라 그의 시집을 선물로 준다. 형 박기호는 가톨릭신학대학 학교 신문에 그의 시집 서평을 쓴다. 물론 형도 박노해가 동생인 줄 몰랐다. 형을 만났을 때 그 서평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참으로 훌륭한 서평이었다. 형은 《노동의 새벽》을 읽으면서 노동운동하는 동생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시집을 내고 그 이듬해 서노련 중앙위원이 되고 그 뒤로 7년 남짓 수배자 신세가 된다. 그리고 1991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으로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경주교도소에서 감옥살이를 한다. 이때 그는 우리말의 뿌리를 ‘직관’에 기대어 찾아간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아내’다.

 “‘아내’라는 말은 ‘안해’라는 뜻이구나. 안해는 내 안에 떠 있는 밝은 해인 거야. 해는 본디 밝은 것인데 안해의 얼굴이 그늘지고 찌푸려져 있다면 그 먹구름은 무엇인가. 바로 남편 놈들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세상의 남편들은 하늘의 맑고 흐림을 살피듯 늘 ‘안해’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을 성찰해야 하리라. 아내 역시 자기 안의 먹구름을 걷어내고 주위를 환하게 밝힐 수 있도록 날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햇덩이처럼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오늘은 다르게’ 29쪽)
 (다음 호에 이어서 씁니다)
김찬곤

광주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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