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논개(朱論介)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과 함께 진주 남강에 투신한 의기(義妓)이며 열녀(烈女)이다. 충절을 기려 의암(義巖)이라고 하며 흔히 ‘논개’라고 부른다. 논개는 몰락한 선비인 주달문의 딸이자 종2품 경상우병사 최경회의 후처이다.

 주논개는 전북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에서 아버지 주달문(朱達文)과 어머니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출생했다. 주달문은 몰락한 양반의 후손으로 소과에 급제하여 장수의 서당에서 학동을 가르쳤다.

몰락 양반의 딸, 나라위해 목숨 바쳐

 논개는 부친 주달문이 사망하자 숙부 주달무의 집에 의탁하여 성장했다. 숙부가 벼 50석에 김부자의 민며느리로 어린 논개를 혼인시키려고 하자 외갓집으로 달아났다. 김부자의 고소로 구금된 논개를 장수현감 최경회(崔慶會)가 석방하고 관저에 의탁하여 살게 하였다. 성년이 된 논개는 최경회의 후처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자 최경회가 의병장이 되었다. 왜군들은 곡창지대인 호남을 점령하기 위해 진주성으로 집결했다. 1592년 11월 의병장 최경회는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달려가서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했다.

 왜군들은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다시 진주성을 공격했다. 1593년 7월 경상우병사로 임명된 최경회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김천일, 황진, 고종후 등과 남강에 투신해 자결했다. 경상우병사 최경회는 충청병사 황진, 의병장 김천일과 함께 삼장사(三壯士)라고 일컫는다.

 진주목사 김시민, 의병장 곽재우의 1차 진주성 전투와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 충청도병마절도사 황진의 2차 진주성 전투를 진주대첩이라고 한다. 진주대첩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한산도대첩, 전라도순찰사 권율의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이라고 한다.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고 촉석루에서 왜군들이 진주성 전투의 승리를 자축하는 주연에 참가했다.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했다.

계월향·산홍과 더불어 의기로 추앙

 광해군의 복위를 꾀하여 처형된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논개가 기녀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라고 처음으로 기록됐다. 1629년 진주 사람들이 논개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촉석루 바위에 ‘義巖(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고 1722년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의기’ 칭호를 받았다. 1739년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인 ‘의기사(義妓祠)’를 세웠다.

 의암(義巖)은 진주성 촉석루 아래 남강 변에 솟아올라 있는 사각형 모양의 바위를 말하며 ‘한 줄기 긴 강이 띠를 두르고, 의열은 천 년의 세월을 흐르리라(一帶長江 千秋義烈)’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의암은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강변과 멀어지고 강변과 가까워지면 난이 일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진주의 논개는 평양기생 계월향(桂月香), 진주기생 산홍(山紅)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의기로 손꼽는다. 계월향은 평양병사 김응서의 애첩으로 적장을 유인하여 목을 베게 한 후 자결했다. 산홍은 첩이 되어달라는 을사오적 이지용의 요구에 역적의 첩이 될 수는 없다고 거절하고 살해했다.

 논개에 대해 일부에서는 진주의 관기라고 하고 일부에서는 양민의 딸로 첩이 된 여자라고 한다. 하지만 임금은 의주까지 도망갔지만 아녀자의 몸으로 조국을 위해 순국한 숭고한 정신은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
서일환<광주우리들병원 행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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