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파(鶴坡) 현기봉(玄基奉)은 전남 영암군 학산면에서 태어났고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 목포 참사로 임명되어 일제의 식민통치의 자문을 담당했다.

 3·1운동 직후 조선총독부의 시국강연 대표로 참여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던 중 1924년 사망했다.

 무송(撫松) 현준호(玄俊鎬)는 전라도 영암에서 호남 최고의 갑부인 현기봉의 아들로 태어났다.

 창평영학숙에서 김성수, 송진우와 함께 학습했다. 휘문의숙을 거쳐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수학했다.

 3·1운동 직후 호남은행을 설립하여 전무로 취임했고 동아일보가 창간되자 감사로 취임했다.

 조선민립대학(현 조선대), 광주공립 여자고등 보통학교(현 전남여고), 광주의학 전문학교(현 전남의대) 등의 설립에 참여했다.

 현준호는 일본제국과 밀착하여 1930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아버지 현기봉과 함께 353명 중의 한 명으로 수록됐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총독부 산하에 설치된 시국대책조사위원회에 참여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징병제 홍보와 학병 지원에 가담했다. 현준호는 친일행적의 대가로 영산강 간척사업권을 따냈고, 송정리-담양 간의 조철선(朝鐵線), 광주-여수 간의 남철선(南鐵線) 철도를 유치했다.

▲조선총독부로부터 간척사업 허가

 현준호는 1939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전남 영암군 서호면 성재리와 군서면 양장리 간 1.2㎞의 갯벌을 막는 서호강 간척사업 허가를 받았다.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 주식회사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간척사업을 시작했다.

 1949년 제방이 완공되자 아버지 현기봉의 호를 따서 학파농장(鶴坡農場)이라고 명명했다. 현준호가 한국전쟁 때 피살되자 아들 현영원이 다시 학파농장 간척을 추진하여 1961년 완공했다.

 학파농장의 총면적은 892만㎡로 개인소유로는 국내 최대이며 3할의 소작료를 받았다.

 학파농장이 완공되자 서호동, 학파동, 죽민동, 남하동, 무송동, 백암동, 신기동 등 대다수 주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현준호는 서호강 간척이 완공되면 20년 후에 주민들에게 양도하겠다고 약속했다.

 1988년 양도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소작농들이 소작료 거부운동을 시작했다. 1994년 소작농들에게 유상양도하며 소작쟁의가 마무리 되었다.

▲학파농장, 3할 소작료 농민 착취

 현준호는 해방이 되자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불구속으로 수사를 받다가 반민특위가 해체되자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광주에서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서 피살됐다. 장남 현영익은 한국전쟁 때 아버지와 함께 인민군에게 피살됐고 차남 현영직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의 포로가 되자 자살했다.

 삼남 현영원은 현대상선 회장을 역임했고 김용주의 딸 김문희와 결혼하여 낳은 딸 현정은은 현대그룹 회장을 역임했다. 김용주는 일제 강점기에 가네다 류슈(金田龍周)로 창씨개명하고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비행기 헌납운동을 전개했다.

 해방이 되자 전방남방직을 불하받아 갑부가 되었다. 김용주의 딸은 용문학원 이사장인 김문희이고 아들은 전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參議)는 일제 강점기에 식민통치의 정당화를 역설하기 위해 설치한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이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활동했던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중추원 부의장, 고문, 참의로 활동한 자’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여 아버지 현기봉과 아들 현준호는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됐다.

 또한 현준호는 2002년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에서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됐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다. 지금도 영암 학산면에는 현기봉의 기념비 철거를 놓고 찬반양론이 계속되고 있다.
서일환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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