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변을 화폭삼은 봄날의 데칼코마니

▲ 사진=전고필.
 1월부터 시작한 코로나19의 위협은 아직 모두의 삶 깊숙이 침투해 있다. ‘슬기로운 집콕생활’이나 ‘냉장고 파먹기’ 같은 것들이 결코 가볍지 않은 용어로 다가오는 이 이색적인 풍경은 대한민국을 넘어 온 세계에 가득하다. 지난 2월 제주의 본향당 굿을 참관하고 이후로는 먼 길을 가는 것이 저절로 중단되었다. 컨설팅이나 강의나 심의, 회의 등으로 한해를 보내는 프리랜서와 같은 직업을 가진 나의 지갑은 떠나는 만큼 채워지는 것인데 이제는 떠날 곳이 없으니 바닥을 헤어나지 못한다.

 봄인데 봄을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동시에 날 괴롭힌다. 여행은 가슴이 떨릴 때 떠나는 법인데, 아파트에 공원에 봄이 한가득이고, 저기 백련사에 동백과 선도의 수선화와 임자도의 튤립이 만개해 있어도 그저 아득할 뿐이다. 그럼에도 사회적 거리두기와 격리의 생활이 조금씩 풀려가는 것은 저 환장한 봄날의 날씨와 지천의 꽃들 때문이다. 이재무의 ‘저 못된 것들’이라는 시가 어울리는 날들이다.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 나를 꼬드기네/ 어깨를 둘러멘 가방 그만 내려놓고/ 오는 차 아무거나 잡아타라네/ 저 도화지처럼 푸르고 하얗고 높은/ 하늘 나를 충동질하네”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이 꼬드겨
 
 결국 나는 나를 이지기 못하고 날을 잡았다. 굳이 또 하나의 핑계를 대자면 그것은 순전히 미디어 사업을 하시는 박종삼 감독 탓이다. 함께 사용하는 카톡 방에 화순의 세량지라는 호수의 아침 풍경을 올렸던 것이다. 아스라이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아침, 스님의 좌선처럼 산위의 풍경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수면, 안개가 없다면 어디가 산이고 어디가 호수인지 그야말로 구분되지 않는 사진은 그냥 숨이 멎게 하는 장면이었다.

사진=박종삼 감독.

 매해를 거르지 않고 그곳을 찾은 나는 단번에 그게 그냥 원샷원킬이 아니리라 짐작했다. 기사를 쓰며 그 사진을 독자와 공유하고 싶어 감독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흔쾌히 주시는데 화소가 낮다고 하신다. 영상 촬영을 캡쳐해서 쓰기 때문이라고, 영상으로 일을 하니 스틸 컷이 아니라고 미안해하신다. 몇 번이나 가셔서 그 장면을 담았냐고 여쭈니 올해만도 대여섯 번은 갔다가 만난 풍경이라고 한다.

 여행사에 근무하던 시절 제주 한라산 안내 등반차 올랐던 날들이 오버랩 된다. 달력 사진 같은 풍경을 찍는 사진 동호회 분들을 모시고 새벽 4시 어리목에서 출발했다. 한라산 정상 왕관봉의 일출 사진과 윗세오름의 철쭉 사진 두 가지를 담아 오겠다는 목적형 등반이었다. 뜻하는 대로 왕관봉의 일출을 멋지게 보고 사진 두서너 장에 담더니 한 분이 성산 일출봉 쪽에 있는 구름 한 점을 보며 저게 왕관봉으로 오면 좋겠다고 하신다. 설마 하면서 하산을 시작해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착했다.

 5월말의 윗세오름은 철쭉이 지천인지라 그곳에 삼각대를 설치하고 모두들 자기만의 시선으로 사진을 찍는다. 한데 몇몇 분은 셔터를 누르지 않고 아까 말한 구름이 서서히 왕관봉으로 오는 것을 기다린다. 도저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래서 헛된 시간이 될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했던 내 예상은 깨져갔다. 물경 3시간을 기다리니 정말 바라던 바처럼 구름은 산정에 똬리를 틀었다. 내내 기다리던 분들의 경쾌한 셔터음이 들린다. 한데 놀라운 것은 그 시간을 기다렸으면서도 카메라에 담는 것은 고작 두세 컷이었다. 마치 저격수처럼 목표물을 향해 모든 것을 준비하고 아주 간결하면서도 신중하게 호흡마저 멈추고 마치 단 한발로 타깃 적중하듯 셔터를 두서너 번 누르고 행장을 꾸리는 것이었다.
 
▲오랜 기다림 찰나의 포착, 작품이 된 사진들
 
 유구무언의 순간이었다. 이러려고 세 시간을 허비했나 라는 실망감이 쏟아졌다. 그런 실망감은 2주일 후 고스란히 깨졌다. 달력 사진보다 더 실감나는 사진을 금남로의 현상소에서 만났던 것이다. 그런 후로는 사진가들의 노력을 결코 허투루 보지 않았다. 가장 적절한 장소를 찾고 가장 알맞은 빛의 시간을 기다리고, 가장 멋진 풍경과 인물을 창조해내며 그것을 혼자만 간직하지 않고 함께 나눌 줄 아는 이들이 바로 사진가라는 사실을 실감나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영상을 촬영하는 박 감독님과 작업을 경험한 나는 그러한 존재감으로 늘 존경해 마지않는다. 시간을 붙들어 매며 가장 퍼팩트한 영상을 창출해내는 인내력과 풍성한 경험, 자신의 분야에 대한 자부심, 하지만 결코 자만하지 않는 겸손함까지. 하여튼 그분의 사진 한 장이 나를 꼬드겼다.

 다음날 아침은 투표하는 날이었다. 선거에 별다른 설렘은 없었다. 그냥 일찍 투표소에 장갑을 끼고 들어가서 망설임 없이 주권을 행사하고 곧장 세량지로 향했다.

 세량지는 화순군 도곡면 세양리 마을에 있는 1969년에 농사를 위해 만들어진 인공 저수지이다. 이 물을 받아 농사를 짓는 면적이 3만3000㎡ 정도이다. 샘이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새암이 세양이 되고 저수지의 이름은 세량지가 된 것이다. 언젠가 제천의 의림지에서 가까운 지인이 의림지와 벽골제 같은 지와 제의 차이를 두고, 지는 그 호수 자체에서 샘물이 솟아나는 것을 말하고 제는 흘러온 물을 고이도록 해서 만든 것을 의미한다는 이야기도 떠오른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인데, 지금 신안군에서는 저수지를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20년이나 30년 후를 바라보며 경관림을 조성하는 사업이 전개되고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진다.

 제방은 서쪽에 있고, 산은 동쪽에 둔지를 형성하다 휘어지며 산정을 형성하고 있다. 제방에서 산을 타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하기에 알맞은 위치다. 아직 해는 떠오르지 않았다. 세상은 다 밝은데, 해는 10여 분정도를 기다려야 하는 아침 7시의 저수지. 제방에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냥 구경 온 사람들은 많지 않다. 배낭 가득 카메라 장비를 메고 양손에는 사다리와 트라이포드까지 장착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사진=박종삼 감독.

 저 장면을 담기 위해 코로나도 무릅쓰고 달려온 정성은 그야말로 대단한 저력이다. 화순군에서는 코로나로 인해 이곳으로 오는 것을 애써 말리고 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선거날이다 보니 행정력이 선거사무소 쪽으로 집중했는지 제어하는 인력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엄중한 시기임에도 출사를 다녀본 사람들은 그분들의 심정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출사를 가지 않아도 그림이나 사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작품만 보아도 작가들의 집중력과 필사의 노력을 알 수 있다. 마치 전쟁기자처럼 단 한 컷을 위해 목숨이라도 내어놓고 다니는 이들의 수고로움. 덕분에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과 사람살이를 모두 공유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삼나무를 중심으로 시종하듯, 알현하듯…
 
 하여튼 제방의 호안으로 사람들의 근접을 막기 위해 철제 난간이 둘러져 물가로는 진입이 어려운 가운데 철제 울타리를 두고 사진작가들은 그 난간에 올라타거나 가져온 사다리를 타고 숨죽이며 아침 햇살이 반영해주는 산의 실루엣이 저주지에 담긴 모습을 담으려 애쓰고 있다.

 그들에게 가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자 해도 찍지 못하는 다른 고장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면 재빨리 사다리를 내어주며 ‘여기서 찍어 보세요’라는 친절함과 양보의 미덕도 다른 곳에서 찾기 힘든 훈훈한 모습이다. 그런 모두에게서는 연신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연출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아함과 그런 광경을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은 경이로움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다.

 이제 새싹을 돋기 시작한 물가의 여러 나무들과 연둣빛으로 물이 오른 버드나무와 핑크빛으로 고개를 떨구며 팝콘처럼 피워낸 산벚꽃이며, 대곡리에서 출토된 청동검처럼 청색으로 독야청청 우뚝 서 있는 외딴 삼나무 한그루, 그 오른편으로 마치 호위무사처럼 군집을 하고 있는 수십 그루의 삼나무들. 찬찬히 뜯어보니 마치 한그루의 삼나무를 향해 식물들은 카펫을 깔고 작은 나무들은 우러러 보고, 벚꽃과 버드나무는 알현을 위해 절을 하고 그 뒤에 병사들이 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뒷산은 궁륭과 같이 이 광경 자체를 안아주는 역할을 하는 듯이 보였다.

 화순에 있는 국보 143호로 지정된 도곡면 대곡리의 창동기 유적 중에서 나온 비파형청동검이나 국보57호로 지정된 쌍봉사의 철감선사부도의 모습이 바로 여기 현존하여 새로운 형태로 그 모습을 비춰주고 있지 않나 라는 착시가 일어나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묘사된 풍경이 필설로는 결코 충분할 수 없을 만큼 세량지의 정경과 투사는 아름다웠다.

 데칼코마니라는 미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4월 중순의 봄날 화순 세량지와 11월초의 백양사 쌍계루에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봄날 7시20분경 해는 구름사이에서 비추다 감추길 반복하는 사이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에는 안개는 끼지 않았지만 아무 구애됨 없이 호수의 심연으로 제 얼굴을 반영하는 모든 나무와 수풀 앞에서 내가 지금 비현실의 세계, 환상적 공간 안에 들어 있음이 오히려 안도감으로 느껴지는 순간을 내내 벗어나지 못했다. 마음에 파문이 일면 곧장 세량지로 찾아가 나를 끄집어내서 저 외딴나무를 나로 생각하고 한참을 응시해보면 좋겠다.
전고필<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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