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고필 터무니를 찾아서] 소소한 여행 강릉1

▲ 초당동 솔숲길.

작년에 이어 강릉을 한 달에 두 차례나 방문을 했다. 6월에 있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생태와 문화관련 기획연수 준비와 대한민국 테마여행10선 워크숍이 일주일 간격으로 열리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여행 목적지를 정하고 나면 그곳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떠오른다. 그것들은 대체로 그 지역의 역사와 삶에 근거를 두고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있다 호출된다.

강릉: 경포대, 경포해변, 강문동 진또배기, 솔숲, 선교장, 초당두부, 허균, 허난설헌, 오죽헌, 테라로사…등으로 튀어나온다. 그래 내친김에 두 차례의 방문에는 이곳들을 다 들러보자는 욕심을 부린다.

전년에 경포습지의 일원을 다녔으니 이번에는 인접한 오래된 관광지와 매력물을 둘러봄직도 하다.

첫 번째 강릉으로 출발할 때 나는 여유 만만한 시간을 가지고 광주에서 대구를 거쳐 포항으로 가서 국도7호선을 타고 강릉에 도착할 야무진 꿈을 꾸었다. 지금은 광대고속도로라고 이상하게 이름 지어져 버린 88고속도로 아니 달구벌 대구와 빛고을 광주를 이어주는 달빛고속도로(이렇게 환상적인 이름의 조합이 나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지만)를 타고 간다.

5월의 신록은 코로나에는 개의치 않았다. 사방이 푸르르고 차들은 이상하리만치 소통이 적은 그 길 위에서 차창을 열고 그 푸르름에 물들여 가며 여유를 부린다. 어느 사이엔가 차에 적혀 있는 주행판 중에 연료 소모량을 유심히 보며, 경제적 주행에 길들여져 버렸다. 이제는 죄인이 되어버린 경유차를 타지만 이상적인 운전을 하면 경유 1리터에 18킬로미터에서 20킬로미터까지 찍는 요술을 부리는데 즐거움을 느낀다.

그렇게 차와 도로가 한 몸이 되어 동진을 계속하는데 뭔가가 이상하다. 지금 상태면 여유를 부릴 수 없는 시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포항으로 가고 다시 국도를 타면 두 시간은 늦을 것 같다. 상상과 욕망이 불러온 사치스러운 시간을 대구 가는 길에 다 소진해 버린 것이다.

정미소가 카페로 변신했다.

한 달에 두 차례 방문한 강릉

결국 동해안 도로를 타는 것은 차후로 미루고 부리나케 중앙고속도로로 옮겨 타고 이젠 풍경 따위는 사치이고 심지어 휴게소조차 무시하고 약속장소인 강릉의 환경센터로 간다. 그 사이에 연락이 온다. 그곳의 훌륭한 시설은 코로나 응급 대기 장소이니 허난설헌 생가 앞에서 보자는 것이다.

마침 식사 시간대라 식당으로 먼저 간다. 모처럼만에 먹는 초당두부는 만족도가 높다. 게다가 ‘알쓸신잡’이라는 유명한 프로그램에 등장한 집이라 하니 내 머릿속에도 이런 저런 지식의 알갱이들이 튀어 나올 것 같다.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이제는 회의를 해야 한다. 인근에 있는 정미소를 개조한 초당 커피 정미소라는 곳으로 갔다. 관광객들이 많은 지역은 이렇듯 낡고 허름한 곳을 형체는 살려두고 내부를 단장하여 여행자들의 이목을 끌어낸다.

90년대 후반 소쇄원 아래 평무뜰이 바로 보이는 곳에 정미소를 카페로 개조했을 때 참 기발하다고 여기었던 것이나. 전북 진안에 계남마을의 정미소를 갤러리로 개조했던 2000년대 초반, 낡고 사라져 가는 곳을 온기가 있는 곳으로 만들어낸 김지연 선생님의 노고가 감사했던 시절이 이제는 일상화 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도 특히 젊은 친구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으니 그러했다. 내부에는 정미소를 돌리던 터번 등이 남아서 그 시절의 자취를 상기하게 한다.

연수 일정에 대한 논의를 마치고 이제 현장을 둘러본다. 소나무 숲 사이는 정식 명칭 ‘강릉초당동 고택’이 있다. 시인 허난설헌의 생가로 알려진 곳이다. 솔바람소리가 일렁이는 오래된 집에 갖은 화초들이 봄볕을 맞이하고 있다.

붓꽃이나 작약, 넝쿨장미들이 집안을 더욱 화사하게 장식하고 있다. 거기에 기품어린 향나무나 잘 늙어가는 능소화는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은방울 꽃.

그런 수목들 사이에 아주 작은 식물들의 군락이 들어난다. 아. 그렇게 시골집에 분양해 오고 싶었던 은방울꽃이다. 조금은 깊은 산자락에서 접하는 잎이 커다래서 그 아래 은색의 꽃이 달린지 모르다가 은은한 향기가 불현 듯 건너오면 그때야 제쳐 보면 종모양의 방울들이 연달아 있는 멋진 모습을 보고 그곳이 향기의 발신지임을 알게 되는 곱디고운 꽃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라거나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라는 말이 이 꽃에 제격인데 내가 그 꽃과 만나게 된 것이다. 몇 해 전 고향집 앞 식당에 왕성하게 자라기에 주인에게 분양을 부탁해 놓고 아직도 옮겨가지 못한 것도 떠오르는 시간이었다.

외양간 고쳐 카페와 갤러리로

이제 솔숲으로 들어간다. 곧게 혹은 구부정하게 자란 몇 백 살 먹은 소나무의 등걸이나 푸른 생명으로 가지를 뻗어낸 기상을 보면 왠지 내 기분까지 활력을 부여해주는 바로 그 나무다.

솔숲 사이의 허난설헌 생가터.

송홧가루가 날리는 계절인터라 그 청신한 내음이 숲안에 가득하다. 조금만 나가면 바다인데도 여기는 숲이다. 해풍 속에서도 무리를 이루며 굳건하게 숲을 만들어내고 가꾸어 온 저력이 감사할 따름이다.

함께 간 동료가 솔방울을 집어 든다. 수류탄 같은 존재감이라는 솔방울의 힘을 말하려는 것일 테다.

겹겹이 비닐처럼 되어 있는 형태의 내부에는 솔씨와 송진이 함께 있다. 그 자리에서 흙과 만나 씨앗을 퍼뜨리기도 하지만 불과 만나게 되면 상황은 급반전이다. 송진은 화약과 같고, 겉모양은 바람을 씽씽 타고 저 멀리 날아갈 수 있는 날개가 되는 것이다.

무려 이십여 미터도 넘게 도약을 하는 바람에 산불이 나면 솔방울이 불을 옮기는 주요한 매개가 된다는 사실. 경이로운 자연의 이면이라 할 수 있다.

이제 경포호 습지를 둘러보고 2015년 처음 방문했을 때와 작년, 달라진 자연적 천이의 과정을 본다. 그런 습지에서도 어울리지 않게 자라고 있는 자작나무가 반갑게 눈에 들어온다. 조성과정에서 실수로 자라났을 법 한데 무성하게 가지와 잎새를 날리며 자라고 있다.

‘소집’의 내부 갤러리.

이제 위치를 옮겨 경포호수의 관문 강문동으로 가서 진또배기가 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연수의 전 일정을 점검해 본다. 모두 작년과 2005년 본 신문에 자세히 안내를 해 드렸기 때문에 안내 글은 패스다.

이제 정해진 일정이 끝나고 여유로운 시간이 남았다. 여분의 시간에 가장 가고 싶었던 핫플레이스를 지목한다. 외양간을 고쳐서 카페와 갤러리로 바꾼 ‘소집’이라는 곳이다. 관광지 같은 벅적거림이 있는 경포호를 벗어나 남항진 근처의 전형적인 강릉의 시골 마을로 들어서니 마을 중앙에 소집이 나타난다.

고종환이라는 아버지와 고기은이라는 따님이 운영하는 그야말로 황소 같은 뚝심으로 창조한 공간이 이곳이다. 민가의 허물어져 가는 소집을 공유공간이자 갤러리와 카페를 겸하게 만들어낸 공력이 곳곳에 스미어 있다. 황소의 색감을 담은 기둥하나 하나가 문화재급이고, 밖으로 하늘로 낸 통유리는 그 자체로 화폭이 된다.

미숫가루를 시원하게 한잔 건네는 고기은 작가에게 강원도의 석호를 담아 펴낸 책을 파시라고 했더니 두 권이 있다고 하신다. 사실 목표가 그 책을 구매하는 것이니 절실한 표정으로 한 권을 분양 받고 싶다고 말씀 드리니 조그만 망설임 이후 쿨하게 건네주신다. 이번 강릉행의 가장 큰 결실이 여기서 생성되었다는 기쁨이 인다.

소집이었음을 알게하는 아카이브.

일상화된 여행, 누구를 위한 것인가?

외국으로만 떠돌며 정작 내 고장의 매력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작업 같지만 한편으로는 깊이 있는 관찰과 여행자의 시선을 결합하여 또 하나의 독특한 석호 여행의 방식을 제안하는 책이었다. 게다가 여행의 과정에서 접하게 된 석호의 소멸이나 단절, 개발의 과정을 보는 안타까운 마음이 환경보전과 지속가능한 지구의 미래라는 관점으로까지 연결되어 있다.

그러고 보면 여행이 떠남을 전제한다지만 그 떠남이라는 말이 자꾸만 자기 생활의 영역 밖인 것으로만 오인되고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제 주변의 것들에 눈을 맞추지 않는다. 나를 지탱하는 온전한 힘은 나를 먹여주고 키워주고 살아가게 하는 내 고장에 근원이 있음을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아버지와 따님이 정말 대단하시다.

“뷰레이크 타임” - 아빠와 딸의 석호여행기는 일상화된 여행이 정작 누구를 위한 것인지 반문하는 것 같다. 전 카메라 감독인 아버지의 시선에 방송작가와 여행작가인 따님의 따뜻한 문장이 얼음 띄운 미숫가루처럼 청량해진다.

그렇게 딴청을 부리는 사이 외출하셨던 아버님이 들어오신다. 이곳을 구축하기 위한 아버지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고, 문화공간으로서 이곳의 역할에 대해 함께 얘기를 나누었다. 평상시애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시와 문장을 접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곳, 글캉스를 통해 글을 쓰며 휴가를 즐기는 프로그램은 소집의 고유한 브랜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예술인 파견지원사업을 진행하는 한국예술인 복지재단의 지원이 이곳에서도 힘이 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하면서 소집을 나와 남항진항에서 가자미무침으로 저녁을 하고 5월 첫 번째 강릉행의 마침표를 찍었다.

광주로 내려오는 길, 이번에는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곧장 내려오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에. 하지만 지친 몸은 나를 어느 휴게소에서 감금하고 말았다. 다음에도 차를 데리고 가야 하는데 말이다.

전고필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