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옷 없이 견뎌야 하는 불안에서의 탈출법

▲ 영화 `토니 다키타니’
 세상에 널린 여러 옷들 속에서 나는 주로 헐렁한 옷을 골라 입는다

 그것은 내가 헐렁한 옷 속에 나를 감춰두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나는, 맘껏 드러내놓고 싶은 만큼이나 친친 감아놓고 싶은 어줍짢음이다

 헐렁한 옷 속으로 내가 나를 슬쩍 밀어 넣으면

 나는 옷의 헐렁함 속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가고

 옷은 나를 끌어당긴 그 헐렁함의 미덕으로 나의 윤곽이 옷 밖으로 도드라지지 않게 해주었다

 헐렁한 옷 속에서 그 동안 나는 속이는 일의 간편함,

 세상에 나의 오목과 볼록을 드러내지 않는 일, 에 젖어있었다

 그러나 많이 입어 더욱 헐렁해진 옷 속에서 지금느껴지는 어떤 움직임, 질깃하게 짜여지지 못한

 내 삶의 올이 풀리고 있다

 옷을 뒤집어 본다, 내가 없다.

 헐렁헐렁한 옷의 안감과 겉감이 있을 뿐이다 처음부터 내가 헐렁한 옷의 안감이었던 것처럼

 속이고 속은 것이 나였다 안심하고 맡겨온 옷의 헐렁함이

 비뚤리긴 했지만 수채화 붓자국이었던 나를 뭉개버렸다

 어디로 갔을까

 내가 세상과 대적하여 어거지로 입었던 그 헐렁한 옷 속에서

 독하게 꽃피워보지도 못한 나는

 -이선영 ‘헐렁한 옷’

 

 단자(單子)간에는 창이 없다

 누군가 내게 인간의 조건을 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인간의 조건은 ‘부채’라고 대답하겠다. 태생적으로 인간은 ‘빚진 자’이다. 육신을 만들어주신 분은 부모님이니 나는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부모님께 빚지고 있다. 눈과 귀, 정신을 즐겁게 했던 음악과 그림, 손 때 묻은 책들은 과거의 유물과 유산이니 나는 그 작품들을 잉태한 영혼들에 빚지고 있다. 어디 그뿐이던가. 내 입은 날기를 희생하고 한 뼘 닭장 속에 갇혀 짧은 생을 마감하는 수많은 ‘마당을 나오지 못한 암탉’과, 양치기가 되지 못하고 익혀진 수많은 ‘꼬마돼지 베이브’들에 빚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조건은 빚이라고 감히 말해보는 것이다.

 하루키의 인물 ‘토니 다키타니’도 마찬가지다. 그는 부모로부터 보통 체구의 몸, 곱슬머리와 함께 차갑고 마른 ‘고독’을 물려받았다. 사실 토니의 고독은 그의 이름에서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아내로 인해 망연자실해 있던 아버지 다키타니 쇼자브로가 생각 없이 붙여버린 이름이 ‘토니’였던 것이다. 1950년대의 본토 일본인 아이에게 ‘토니’라니, 그건 토종 한국인인 나를 ‘앤 박’이나 ‘제인 박’ 이라 부르는 것의 느낌과 같지 않은가. 이름으로 인한 오해와 의심, 사생아 혹은 혼혈아라는 혐오의 시선은 토니를 따라다닌 그림자였고, 그 그림자와 함께 어린 토니는 학교엘 가고 빈 집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 이름과의 불화, 관련성 없음은 토니 다키타니의 첫 번째 고독의 동심원이었던 것이다.

 사람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이 두 가지 있다. 투쟁과 피해서 꼭꼭 숨기. 얼핏 보면 둘은 반대인 듯 보이지만 투쟁과 도피는 두 방법 모두 내가 맞닥뜨린 존재의 명확성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피한다는 것은 ‘그것의 대적할 수 없음’을 드러내 보이는 행위이다. 파괴하고 제거하는 투쟁은 그것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이루어진다. 어린 토니 다키타니가 선택한 방법은 사건의 무화(無化)였다.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무심함으로써 그는 담담하게 오해와 곡해의 시간들을 이어갔다. 그러다보니 혼자인 일상은 어느새 자연스러운 삶의 ‘전제조건’이 되었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감정을 나누지 않는 이른바 ‘관계의 부재’는 토니 다키타니의 두 번째 고독의 동심원이 되었다.

 다키타니는 그림을 좋아했다. 68혁명세대를 살아가던 미술대학의 동료들은 그의 그림에 결여된 사상성을 비판했으나 인간의 사상이 사물을 ‘어떻게 더 낫게 하는지’ 다키타니는 이해하지 못했다. ‘실물을 보는 것보다 더 사실적인’ 그림. 시대가 요구하던 사상성의 부재는 그의 세 번째 고독의 동심원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도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빠르게 변해갔다. 자동차를 비롯한 각종 기술적 제품이 시장에 쏟아지기 시작하자 회사들은 사진이 아닌 펜으로 기계적 메커니즘을 그대로 구현해낼 수 있는 작가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더하지도 덜어내지도 않은 그림, 극도의 세밀함. 토니가 사물을 보던 방식은 곧 세상이 추구하는 시선이 되었다. 변하지 않은 건 토니 다키타니 뿐이었다. 이쯤에서 생각한다.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에 기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과, 기댈 무엇인가가 없어 처음부터 늘 홀로였던 사람 중 누가 더 슬픈 것인가.

 철학자이자 미적분을 발명한 수학자 라이프니츠는 말했었다. “단자 간에는 창이 없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인간 한 명 한 명은 우주를 반영하는 자족적 단위인 하나의 단자(單子)다. 단자의 본성은 ‘활동하는 힘’ 혹은 ‘혼’이며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 욕구란 다름 아닌 이 지각에서 저 지각으로 넘어가려는 욕구다. 단자들은 자신의 지각에 의해 우주를 반영하면서 자기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단자가 지각하여 반영하는 우주의 모습은 바로 그가 욕구한 우주이며, 자기를 표현한 것이 된다. 재미있다. 놀부가 봤다고 주장하는 삼라만상-이웃의 모습 그리고 그에 대한 표현은 곧 그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라니 묘하게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각각의 단자들은 창을 갖지 않는다. 인간의 인식이란 것이 결국 머리 안에 들어있는 닫힌 뇌의 작용이자 해석이듯이 ‘혼’이라는 무공간적 단자들도 자족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이 말은 내게 단자의 ‘독립성’ 보다는 소통의 어려움 혹은 힘겨움을 떠올리게 했었다. 그래서 토니 다키타니는 고통스럽지 않게, 충분히 자족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한 번도 누군가와 소통하려고 욕망해본 적도 시도해본 적도 없는 완전한 자족성. 그러다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하고야 만다. 사랑이다.

 

 고독의 이면

 그녀는 사무실로 일러스트레이션 원고를 받으러 온, 거래처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자였다. 그의 마음을 격렬하게 요동치게 하는 그 무엇, 그녀가 원고를 받아 돌아간 후 토니 다키타니는 깜깜해질 때까지 아무 것도 못하고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무서운 것은 그라는 단자(單子)의 변화였다. 지각이 그녀에게로 향한 후 그는 처음으로 ‘감옥과 같은 고독’을 느끼고 전율했다. 자신을 둘러싼 벽의 두꺼움과 차가움, 배를 위로 향하고 뒤집혀버린 게처럼 나는 이러다가 죽어버릴지도 몰라. 서른일곱 해 동안 그는 가나초콜릿처럼 감미로운 고독안에서 유영했었다. 그런데 그녀라는 단 한 번의 등장이, 고독이 가진 쓰디쓴 이면을 상기시켜 고독을 견딜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현실을 잊게 하는 것도 사랑이고 처한 현실을 총체적으로 보게 하는 것도 사랑이다. 그는 그녀와 결혼했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제2의 생. 외로운 것은 그녀였다. 그녀 내면의 텅 빈 구멍, 실존적 공허였다.

 

 그녀의 옷

 좋아하는 화가 중에 빌헬름 함메르쇼이가 있다. 검정과 회색의 톤 절제와 붓 터치가 보이지 않는 매끄러운 표면. 무균질의 깨끗한 공간. 감정도 색도 최대한 담담한데 그림을 보는 나의 감정은 담담하지가 않다. 그림 속 남자와 여자의 등에 내려앉은 침묵은 마음을 울리고, 공기는 옷처럼 인물을 감싼다. 뫼르소가 ‘이방인’에서 웅변했던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 그리고 사물에 대한 함메르쇼이의 깊은 시선이 전해지는 그림. 나의 주관을 섣불리 개입하지 않고 그것을 그것 자체로 보고자 할 때 사물은 자기를 드러낸다는 것을 그림은 알려준다. 그런데 왜 내게는 함메르쇼이의 지극한 사실성이 오히려 비사실적으로 보이는가.

 세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실이 아닌 포장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광고와 연예인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이 구매와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조작된 쇼임을 우리는 알면서도 모른 척 한다. 스펙터클에의 열광, 늘 보여 지는 것들이 이렇기에 담백한 그대로의 것이 오히려 낯설다. 우리는 뉴스에서 맞닥뜨리는 사건이 필요와 목적에 의해 앞뒤가 잘려 선택된 것임을 알면서도 무시한다.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말들은 또 얼마나 자의적으로 왜곡되던가. 말이 몇 사람의 입을 거치면 오히려 허구에 가까워짐을 우리는 모른 척 한다. 지루하거나 심심한 이 시간,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리 짓기’ 일 뿐 담담한 진실 혹은 이해를 위한 사실이 아님을 우리는 애써 잊는다. 그리고 그러한 나 자신의 면면을 직시하는 것이 인문학 혹은 철학의 시작이다.

 토니 다키타니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그녀도 세상의 어떤 불균형 혹은 자기 존재의 가벼움을 깨닫고 있다. 토니 다키타니의 사무실로 그녀가 처음 걸어들어온 날, 그녀의 옷차림은 마치 머나먼 세계를 향해 날아오르는 새가 바람을 걸친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옷맵시는 감탄을 넘어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녀의 몸에 걸쳐진 후 새롭게 생명을 얻는 옷. 문제는 너무 많은 옷들이었다. 커다란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계속 불어나는 옷과 신지 않은 신발들. 그러나 새 옷을 보지 않으려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그녀는 자신이 텅 비어버린 듯했다. 열흘 전 샀던 값비싼 코트와 원피스를 반품하고 돌아오던 교차로에서 그녀는 트럭과 충돌했다. 뭔가 느낄 틈도 없었다. 옷 없이 견디는 방법은 없었다. 그녀에게 이곳은 공기가 너무나 희박한 행성이었다고 하루키는 썼다.

 

 소유와 공존의 사이, 무엇이 있는가.

 

 목욕하러 내려온 선녀의 날개옷을 훔쳐 결혼에 골인했던 나무꾼은 아이 둘 나을 때까지 행복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아낙이 된 선녀도 자신의 삶이 만족스러웠을까. 어쩌면 나무꾼과 나무꾼을 더 많이 닮은 지상의 아이들인 두 자식이 깊이 잠든 밤마다 그녀를 향해 내려온 달빛을 입고 숲속 공터에서 홀로 처연한 춤을 추어보거나 하지는 않았을까. 소설속의 그녀는 이름이 없는데, 이름과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그림’이라는 세계로 존재를 확장해갈 수 있었던 토니와는 달리, 그녀는 집안일을 해내고 걱정을 끼치지 않는 토니 다키타니의 참한 아내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옷은 스스로에게 점점 흐릿해져가는 그녀 영혼의 경계를 잡아주는 일종의 각성제였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옷은 선녀의 날개옷이 아니다. 옷을 아무리 바꿔 입어본들 찾고 싶은 내가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731벌의 옷 속에서 그녀는 오히려 점점 스스로를 상실해갔으니 그녀가 옷들, 그리고 옷 없이 견뎌야하는 불안으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은 정말로 먼 세상으로 바람을 입고 날아가 버리는 것 뿐이었겠다. 고독하지 않게 됨으로써 또다시 고독해지면 어쩌나, 했던 토니 다키타니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선녀를 잃은 나무꾼처럼 진짜 외톨이가 되었다.

 사람은 옷을 입는다. ‘헐렁한 옷’의 시인처럼 옷 속에 나의 오목과 볼록을 감추기 위해 입기도 하고 나의 부와 취향을 드러내기 위해 입기도 한다. 부르디외는 현대의 상품은 기능적 필요가 아니라 그것이 지닌 상징성에 의해 구입된다고 말했다. 참으로 그렇다. 모월 모시에 출시되는 따끈따끈한 신형 아이폰을 사기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던 풍경은 그리 낯선 모습이 아니다. 사람들은 상품이 아닌 브랜드가 상징하는 사회적 지위와 특성들을 사기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그리고 그 물건을 소유하고 몸에 걸치는 잠깐 동안, 오직 돈을 위해 달려왔던 노동의 수고로움을 잊는 것이다. 하지만 유행은 금세 바뀌고 어제의 신상은 오늘의 퇴물이다. 그러므로 나의 껍질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계속 수고로울 수밖에 없다. 생각한다. 토니 다키타니는 그녀를 만나 행복해졌건만 왜 그녀는 끝까지 공허했을까. 소유와 공존의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박혜진 <지혜의숲 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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