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은 자신을 사랑했을까?

▲ ‘심청전’_ 휴이넘.

 지상의

 많은 길들은

 길이 아니더냐.

 

 오직 한 길

 그 길밖에

 길이 아니더냐.

 

 차라리

 나를 팔아

 너를 사지.

 

 어찌

 너를 팔아

 눈을 사랴.

 

 안 된다,

 그리는

 안 된다.

 

 차라리

 애비를

 죽여라.

 

 모질고

 독한 년

 

 못 간다

 그 길은 못 간다.

 

 -송현 ‘심청에게1’

 

 심청은 땅으로 귀양 온 선녀였다.

 어렸을 적 내 놀이터는 학교도서관이었다. 집으로 향해봤자 가장 먼저 도착하는 건 언제나 나. 내가 우리 집의 점등인이었다. 가르치는 모든 아이들이 아들딸이었던 엄마는 학교가 집이었다. 그래서 나도 아예 학교를 집으로 삼기로 했다. 그래서 둥지를 튼 건 학교 도서관. 전 학년 통틀어 열여덟 반이었던 시골의 작은 학교 도서관은, 교실보다 작아서 혼자 있어도 무섭지 않았다. 책을 빌려가는 용도만 있었는지 책상과 의자도 없었다. 벌러덩 누워서 책을 읽었다. 나무널판으로 촘촘히 엮인 바닥은 서늘하고 다정했다. 동서양의 오래된 이야기들과 고전동화들, 심청도 그렇게 만났다.

 소녀는 신선 서왕모의 딸일러니 반도진상 가는 길에, 옥진비자 잠깐 만나, 수어수작 하옵다가, 시각 조금 어긴 고로, 옥황상제께 득죄하야, 인간계로 내치심에, 갈 바를 모르더니, 태상노군 후토부인, 제불보살 석가님이, 댁으로 지시하여 이리 찾아 왔사오니, 어여삐 여기소서. 품안 달려들어, 곽씨부인 놀래어 깨달으니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 - 판소리 심청가 가사

 고전을 어린이용 그림책으로 편집하는 것에 반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터, 만약 짧게 할 수 있었다면 왜 긴 이야기로 풀었겠는가. 심청이 선녀라는 것과 심부름 다녀오는 길에 친구 만나 수다를 떤 벌로 하늘에서 땅으로 내침을 당하는 시작은 어린 나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불쌍해서 어이할고 가엾어서 어찌 할고, 천상에 살던 선녀가 지상으로 떨어지는 벌보다 더 가혹한 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땅으로 내려와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소한 실수로 벌을 받아 땅에서 살게 된 선녀이거나 선남이지 않을까. 체육시간이면 뛰어놀지 못하고 화단 옆 계단에 앉아있던 반 친구가 불현듯 생각났다. 심장이 약하다고 했었지. 그 아인 어쩌면 선녀일지도 몰라. 고통에도 의미가 있어, 그 사람을 성장시키거나 본디의 고귀함으로 돌려놓는 일을 한다고 여기게 된 건 아마 그 때가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가르치고 가르침 받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되었으나 내가 기억하는 심청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아이는 없었다.

 

 심청은 효녀였을까?

 선녀인 전생을 알게 된 내게 심청이 효녀나 아니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어서, 책을 읽는 동안 내 관심은 온통 그녀가 지은 죄의 값을 씻고 하늘로 돌아가느냐 마느냐에 쏠려있었던 것 같다. 조마조마 책장을 넘겼다. 삶의 가혹함이 처절해지는 딱 그만큼 그녀의 선택과 결단도 단단해지고 명확해져갔다. 공양미 삼백 석을 대신 갚아주겠노라는 정승부인의 말을 거역하는 건 ‘내 아버지의 일이니 저가 책임지겠노라’는 자기 책임에 대한 명료한 의식이다. 심청은 덧붙인다. ‘공양미 삼백 석을 절에 시주해 부처님과 아비의 약속을 지키게 되더라도, 남경상인의 생사가 걸린 문제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내 목숨이 중한 만큼 그들의 목숨도 소중하다. 이것은 서로의 목숨을 걸고 한 약속이다.’ 심청이 오직 효의 관점에서 행동했다면 그녀는 정승부인의 제안을 받아들임이 마땅했을 것이다. 아비와,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타인의 실존과 자아의 실존을 더불어 고려하게 될 때 선택의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그녀는 약속을 이행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너울너울 입을 벌린 인당수는 그녀를 받아들인다. 내가 그날 도서관에서 울었던가. 모르겠다. 그러나 해가 뉘엿 저문 학교 운동장을 엄마와 걸어 나오면서도 ‘외롭다’고 느낀 건 인간이 내리는 결단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자기만의 고독이 있어, 그 내막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작은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나도 그렇겠지.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때 사람들은 세상의 기준에 맞춰 이런저런 조언을 하겠지. 그러나 누가 알 수 있으랴. 때로 한 개인은 집단 전체를 초월하기도 한다. 내게 심청은 자기 운명을 그대로 겪어낸 소녀영웅이었다. 이야기의 해피앤딩은 “그래서 모두가 행복했습니다.”가 결정짓는 게 아니다. 만약 심청이 부활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그 이야기를 해피앤딩으로 기억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선녀성을 잃지 않았으므로. 가난한 몰락양반의 딸로 태어나 인당수에서 마지막을 끝냈어도, 인간의 숭고함은 끝내 잃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살고 싶다.

박혜진 <지혜의숲 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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