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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일방 성쇠기] <1>수탈… 목화의 고장
'목화포’ 통해 일제로 무한공출
온난하고 서리적은 재배 적지 전라도 수탈 상처 커
채정희 goodi@gjdream.com
: 2008-08-13 07:00:00
1년 두 번 꽃이 핀다는 목화밭. 이 꽃이 지면 열매가 열리고 마지막으로 솜꽃이 핀다. 작물과학원 목포시험장에 목화꽃이 피었다.

 1935년 첫 가동, 광주·전남 근대화를 이끌었던 방직회사가 70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북구 임동 일대 광주의 랜드마크처럼 버티고 선 전남방직·일신방직이다.

 일제하 노동력과 원료 착취라는 제국주의의 첨병으로서 `원죄’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지만, 지역경제를 좌우했던 주춧돌이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에서 그때의 위용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쇠락은 숨길 수 없는 현재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어떨까? 한미 FTA 등 곧 닥칠 자유무역체제가 희망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70년 광주 기업의 행보가 `기대반 우려반’인 것. 광주시민 모두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는 전방·일방의 과거와 미래를 기록해본다.  <편집자 주>


화도화(花挑花). ‘꽃이 피고 복숭아가 열리고 다시 꽃이 핀다.’

씨를 뿌리면 여름에 꽃이 피고, 그 꽃 지면 복숭아처럼 단단한 열매가 되며, 그 열매가 여물어 가을 무렵 하얀 솜이 터져 나오는 성장과정을 그렇게 표현했다.

1367년 고려 공민왕 때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붓대롱에 씨앗을 숨겨 들어온 후 조상들의 생활혁명을 일군 고마운 존재, 목화다.

무명옷 한 벌이면 추위를 잊을 수 있었던 백성들은 송덕비를 세워 문익점을 기려왔던 터다.

<찔레순도 껍질 벗겨 먹었고, 뱀딸기도 따먹었고, 개더덕도 캐먹었다. 먹는 것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그러나 아이들이 손대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유월 들어 영글기 시작하는 목화다래였다.(중략) 다래를 따먹다가 들키면 어른들은 정말 화가 나서 머리통에 주먹질을 해대게 마련이었다. (중략) 보리나 밀은 사람이 먹고 사는 음식이었고, 다래는 솜으로 두고두고 써야 하는 물건이지 먹어 없애는 음식이 아니었다.>(후략) 조정래의‘태백산맥’중에서.

작가의 묘사처럼 목화는 ‘죽 한 끼 제대로 넘길 수 없도록 춘궁이 극에 달한 시절’에도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되는 귀한 작물이었다.

기본적인 의식주 중, 입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줄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근대 산업화를 이끌었던 산업이 방직이라면, 그 출발은 단연 목화로부터였다.

목화 솜을 타서 실을 뽑고, 실을 짜서 옷감을 만드는 작업이 기계화되면서 세계는 산업혁명시대를 구가하게 된 것.

우리나라의 근대화도 세계의 흐름과 별반 다르지 않은 궤적이다.

방직공장 이전 목화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목화의 본고장은 기후가 온난하고 평야지인 전라도 등 남부지방이었다.

이 자원에 먼저 눈독들인 세력은 일제였다.

방직공업은 발달했지만, 습하고 일조량이 적어 목화 재배지로는 부적합했던 본토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

근대화에 먼저 눈뜬 제국주의 일본은 원료 공급지와 판매시장 개척에 혈안이 돼 있었으니, ‘식민지’ 한반도가 수탈의 표적에서 벗어날 수 없음은 자명했다.

한반도에서도 전라도의 상처가 컸다.

‘3백(白), 2흑(黑)’의 고향, 산물이 풍부했던 탓이다.

쌀·목화·누에고치가 ‘3백’, 무연탄과 김이 ‘2흑’으로 전라도가 주산지였다.

군산항이 쌀의 수탈 기지였다면, 목화는 목포항을 통해 공출됐다.

‘광주100년’의 저자 박선홍 선생이 “목포라는 이름이 목화포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고 설명할 정도.

한국 땅에서 자라던 목화는 이른 바 ‘문익점 목화’로, 재래종(동양면)이었다. 이는 섬유장이 짧아서 기계화된 방직에 적합하지 않았다.

공장용은 따로 있었던 바, 육지면(미국면)이었다. 섬유장이 길고 색상이 좋아 좋은 옷감이 될 수 있었던 것.

 ▲ 일본에 본사를 둔 `가네보’ 방직회사가 1930년 현재의 학동 삼익세라믹맨션 자리에 설립한 공장. 설립당시 주변은 허허벌판이었는데 공업용수로 광주천 상류의 깨끗한 물을 끌어다 쓸 수 있어 이곳에 공장을 지었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 발간 `光州’ 제공>


한반도에 육지면이 들어온 게 1904년. 일본 영사 와까마쓰에 의해서였다.

1890년대 목화 주산지인 중국의 사시(沙市)지방에서 근무했던 와까마쓰가 목포 고하도에 육지면을 시험재배해 성공을 거둔 것. 현재 고하도엔 이를 증거하듯 ‘육지면 시배지’ 표지석이 남아 있다.

이때부터 한국에서 육지면 재배량이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서리가 적은’ 기후조건을 갖춘 전남·북과 경상도 등 남부지방이 주산지였다.

‘광주100년’에 따르면 1909년 전국의 목화 생산량은 1482근이었고, 이 중 재래면이 97%인 1437근을 차지했다.

하지만 1924년엔 비약적으로 늘었다. 전국에서 1억4017근이 생산됐고, 이 중 72%인 1억122근이 육지면이었다.

이 시기 일본은 방직산업을 기간산업으로 육성하던 때. 재배된 목화의 대부분은 목포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됐다. 한국이 일본 방직산업의 원료공급지가 된 것이다.

일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원료 공급 원활과 값싼 노동력 활용을 위해 한국에 방직공장을 짓고 현지경영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 선봉기업은 종연방직(종방·일본식 표기 가네보)이었다. 가네보는 1930년 학동에 목화에서 실을 뽑는 제사공장을 짓고 광주에 첫 진출했다.

이어 1935년 가네보는 임동 일대에 종연방직 전남공장을 건립했다. 전남방직·일신방직의 전신이다.

글=채정희 기자 goodi@gjdream.com

사진=임문철 기자 35mm@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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